[시사오디세이] 말의 망치와 말의 뭉치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말의 망치와 말의 뭉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23-03-27 10:15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이승선 교수
이승선 교수
열아홉 명이 모인 공공연한 자리. 처음 열린 회의장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이 발언할 차례였다. 단정한 차림의 신사는 참석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안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삼십 년 동안 가슴에 품었던 말을 꺼내겠다고 운을 뗐다. 지금은 변호사가 된 서른 해 전의 아무개 검사에게 신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고개까지 숙였다. 1990년대 중반 신사가 회사를 운영할 때, 어쩌면 꺼져버릴 수도 있었던 당신의 회사 직원 한 사람의 앞날을 그 검사가 열어주었다고 했다. 갱생의 기회를 얻은 그 직원은 그 후 누구보다 건실한 시민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면서, 그래서 그날은 꼭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말을 가슴에 묻어 둔 것이 삼십 년 되었다고 했다.

가슴에서 서른 해 데워진 감사하다는 말의 온도 때문이었던지, 회의장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홑겹의 옷을 걸쳤을 뿐인데도 온종일 따뜻하게 보냈다. 삼십 년 전에 혈기 왕성한 젊은 검사였을 변호사는 그제나 지금이나 결이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변호사의 삶이 그와 같지 않았더라면 정장의 신사가 공연한 자리에서 오래된 감사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었다. 고운 말의 반은 말을 하는 사람이 만들고, 나머지 말의 반은 말을 듣는 사람이 만든다는 이치를 또 배웠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가슴에 밭을 갈고 따뜻한 말의 뭉치들을 키우며 산다. 감사하다, 고맙다, 덕분이다, 그러자, 힘내라, 아자 아자. 같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에 성이 차지 않는 듯,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 사람의 가슴에 못이 되는 말을 망치질한다. 개, 충, 뇬, 녀, 놈, 끼, 자, 리, 기, 딱, 바리, 발이, 어라, 져라.

욕이 아닌 말도 쓰임새가 잘못돼 미늘처럼 가슴에 박히고 평생에 걸쳐 사람의 마음을 곪게 만든다. "하의 상은 되겄다". 딸에게 한 말이었다. 아홉 명 중 일곱째 등수가 '하의 상'이었다. 꼭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슴에 대못이 될 뻔한 아버지의 말에 딸은 상처받지 않았다고 썼으나, 사람 살이에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쳤다는 어떤 느낌이었노라고 적었다. "잘못 봤겄제". 사회주의자이며 유물론자인 혁명가 아버지는 혈육의 동생에게도 '무심히 비수'를 던졌다. '처벅'이라고 신문에 인쇄된 미국 사람의 이름을 '퍼벅'이라고 잘못 읽었을 뿐인 동생은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공연한 곳에서 혁명가 형에게 면박당했다. 처벅이든 퍼벅이든 펄벅이든 빙그레 웃고 넘어가더라도 될 일이었다. 집으로 달려간 동생은 그날 밤 됫병의 소주를 마셨고, 반백 년을 형과 서먹서먹하게 살았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그려진 삽화다. 소설은 삶의 모든 순간이 파편처럼 예제 흩어져 있다가 부음을 듣고 마치 '헤쳐 모여'라는 구령을 들은 듯 모여들어 그 사람의 거대하고 뚜렷한 존재를 우뚝하게 드러내는, 그 사람의 생전의 말의 역사이기도 한 장례식장의 풍경을 그렸다.

얼마 전 대법원은 유명한 여성 연예인을 '국민 호텔녀'라고 공격한 것은 모욕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온라인 뉴스 댓글에서 그런 정도의 표현은 용인될 수 있다고 보았으나 대법원은 표현의 자유 범위를 벗어났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나아가 대법원은 성별이나 출신 지역, 인종 등을 이유로 난무하는 혐오 표현 중에는 모욕죄로 처벌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며 그러한 경우 모욕죄가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데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법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이미 2020년 12월, 똑같은 말을 했다. 혐오 표현을 직접 형사 처벌하는 법률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혐오 표현으로부터 사람들의 인격을 보호하는 데 모욕죄가 기능한다고 보았다.

언론 보도가 말의 망치질에 합류하고 심지어 앞장서는 경우가 많다. 시민을 진영으로 나누고 상대편에게 비수를 꽂으려는 못된 정치인들의 혐오스럽고 거친 말을, 날것 그대로 가져와 따옴표 처리해 보도한 사례들이 그 예다. 인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글로 쓴 유명한 사람들의 소셜미디어 메시지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옮겨와 혐오스럽게 재생산하는 언론 보도 역시 문제다. 언론의 언어는 더 정제되어야 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민주당 절반의 성공·국힘 예상외 선전… 내란청산·정권심판 팽팽
  2. 국민의힘 백성현 후보, 52.63% 논산시장 재선 성공
  3. '서산지역 충남도의원 선거 판 뒤집혔다' 서산, 더불어민주당 모두 석권
  4. [2026 지선] 세종시의회 '민주당 18석·국힘 3석' 재편
  5. [숏폼영상] 허태정, 4년 만에 대전시장 복귀… 시민 선택 받았다
  1. [2026 지선] 12년 만에 '세종교육감' 바뀌나… 강미애 1위 굳히기
  2. [2026 지선 투개표 이모저모]"이재명 대통령처럼 나도 한번"
  3. 진주시의회권력, 4년 만에 판이 바뀌었다
  4. [2026 지선] 세종교육감 임전수 후보, 오차범위 밖 '우세'
  5. 이제는 '23대 총선' 앞으로… 6·3 지선 충청권력 구도 개편

헤드라인 뉴스


더불어민주당 `금강벨트` 압승… 충청 지방권력 전면교체

더불어민주당 '금강벨트' 압승… 충청 지방권력 전면교체

3일 막을 내린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8년 전 치른 제7회 지방선거와 같이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민주당은 충청권 광역 지방정부 수장인 4개 시·도지사를 석권한 데 이어 양대 축인 4개 광역의회 또한 다수당 지위를 확보하며 충청의 핵심 지방권력을 손에 쥐었다. 국민의힘은 4년 전 제8회 지선에서 차지했던 지방권력을 무기력하게 내주며 지역에서 주도권을 대부분 잃게 됐다. 충청에서 이겨야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정치권 속설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사례가 됐다. 최종 개표 결과, 금강벨트에서 큰 이변은 없었다. 국민의힘이 충청권..

[대입+] 6월 모평 국어·영어 쉬워지고 수학 비슷… 체감 난도는 엇갈려
[대입+] 6월 모평 국어·영어 쉬워지고 수학 비슷… 체감 난도는 엇갈려

202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가늠자인 6월 모의평가가 전국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전문가들은 국어는 지난해 수능보다 쉬웠고 수학은 비슷하거나 다소 쉬웠으며 영어는 지난해 수능보다 평이했지만 일부 문항 탓에 체감 난도는 높았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4일 전국 2124개 고교와 564개 지정학원에서 2027학년도 6월 모의평가(모평)를 실시했다. 평가원은 고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을 충실히 반영하고 대학 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을 측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김문희 평가원장은 "사교육을 통한 문제풀이 기..

행정수도 시계 빨라지나… 조상호 "올 가을, 특별법 처리 골든타임"
행정수도 시계 빨라지나… 조상호 "올 가을, 특별법 처리 골든타임"

민선 5기 세종시정을 이끌 조상호 당선인이 행정수도 세종 완성과 재정난 등 지역 핵심 현안 해결을 위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특히 올 가을 정기국회를 행정수도 특별법 처리의 골든타임으로 보고, 연내 입법에 총력을 기울이겠단 입장이다. 더불어민주당 조상호 세종시장 당선인은 이날 오전 세종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행정수도 세종 완성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며 "특별법 관철과 개헌을 통해 세종의 새 미래를 열어가겠다"고 밝혔다. 조 당선인은 이번 선거 승리가 단순한 개인의 영광이 아닌, 이재명 정부와 보조를 맞춰 세종의 미..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지방선거 끝…선거벽보 철거 지방선거 끝…선거벽보 철거

  • 분주한 개표소 분주한 개표소

  • 허태정 대전시장 후보 당선 ‘확실’ 허태정 대전시장 후보 당선 ‘확실’

  • 출구조사에 ‘엇갈리는 희비’ 출구조사에 ‘엇갈리는 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