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의리가 밥 먹여 주나?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의리가 밥 먹여 주나?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 승인 2023-04-17 08:40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송복섭 교수
코로나 팬데믹과 OTT 덕분에 집 안에서 외국 영화와 드라마를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극 중에서 심심찮게 자주 듣는 단어가 'loyal'이었다. 왕과 신하와의 목숨을 건 영웅담부터 갱단 조직원 간의 배신과 복수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정치드라마까지 마음을 사로잡는 묵직한 개념이 'loyalty'였다. '충의'로 번역되지만, '의리'를 번역기로 돌리면 'loyalty'라고 나온다. '의리'를 국어사전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고 정의한다. 한편으로 의리란 왠지 동양적인 미덕일 것 같다는 심정에서 서양영화에 등장하는 'loyalty'를 의리로 고쳐 부르기에는 살짝 낯선 감이 없지 않다. 일본사람 아베 나미코는 '자기희생적인 헌신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의리를 설명하는데, 이 말도 우리에겐 적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유추해보건대, 모든 것이 불확실하던 시대에 예측 가능한 안전한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의리를 숭고하게 바라보는 생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배신이 넘쳐나던 난세에 의리는 중요한 미덕으로 강조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충과 효의 가치를 철학적 원리로써 온 백성에게 가르치고 절대시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는 삼국지연의의 장엄한 출발점이 되고, 남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구혼자를 물리치느라 20년이 지나도록 옷을 짜고 풀기를 반복했던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서양 여성 의리의 상징으로 남았다. 심지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주인에게 보은하는 까마귀와 진돗개의 의리도 칭송한다.

그런데, 의리를 강조함은 한편으론 그것이 누군가에게 이득이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이도 있지 않을까? 노은희 PD는 '의리가 밥 먹여 주는 한국사회'라는 글에서 '이 아름답고 정교한 의리의 네트워크에서 피해자는 없다. 그들은 모두 뭔가를 주고받았다. 피해자는 네트워크 밖에 존재한다.'라고 지적한다. 누군가는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의리를 지키자니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내몰리거나,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그리하여 '의리가 밥 먹여 주냐?'라는 말이 생겨났다.

어느새 의리를 지키느라 자신을 몫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는 세상이 되었다. 오랜 세월 호형호제하다가도 불리한 상황이 되면 온갖 내밀한 치부를 들춰내는 모습을 자주 마주한다. 내가 덜 다치기 위해 의리를 저버리는 단계를 지나 남들은 관심 없는 사실도 굳이 드러내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한때는 의리를 저버림에 미안해하는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다면, 이제는 당당한 투사의 모습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해 억지를 부리다가 기록영상을 확인한 다음에도 사과가 아닌 배짱으로 일관하는 일도 일상에서 겪는다. 더는 의리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오는 걸까?



구한말을 되짚어 본다. 무도한 열강이 힘을 내세워 침탈의 기회를 엿보던 시절, '안에서 썩어 망했다'라는 식민사관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판단 아래 부화뇌동하던 무리가 있었음을 안다. 새로운 세상이 몰고 올 변화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도 모른다는 지식인의 인식과 방관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고 본인의 운명도 주체적으로 건사 못하는 꼴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율리우스 시저의 '갈리아 전기'를 보면, 점령할 갈리아 지역의 풍토와 부족의 습성을 자세히 분석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그 결과 각 부족을 이간계로 쉬이 평정할 수 있었다. 갈리아인은 민족 전체의 역사와 정체성보다 제 부족의 이익을 우선하여 이웃 부족과 반목하다 남의 손에 망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이익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많이 있다. 인간의 뇌에는 끊임없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는 회로가 작동하고 있음을 최근의 뇌과학 연구가 밝혀냈다고 한다. 이익추구는 수단일 뿐 목표가 될 수가 없다.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과도 같아서 도달할수록 더한 갈증을 느껴야 하는 구조다. 가까운 이익에 매몰돼 숭고한 의리를 저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의리의 아이콘 김보성에 열광하는 배경에는 각자도생의 이익사회에서도 희미해져 가는 의리의 가치를 우리가 여전히 염원하는 증거다.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4658만$ 수출계약 맺고 거점 확장"… 김태흠 지사, 중국·베트남 출장 마무리
  2. 공회전 상태인 충남교육청 주차타워, 무산 가능성↑ "재정 한계로 2026년 본 예산에도 편성 안 해"
  3. [중도일보 창간74년]어제 사과 심은 곳에 오늘은 체리 자라고…70년 후 겨울은 열흘뿐
  4. [창간74-축사] 김지철 충남교육감 "든든한 동반자로 올바른 방향 제시해 주길"
  5. [창간74-축사] 김태흠 충남도지사 "중도일보, 충청의 역사이자 자존심"
  1. [창간74-축사] 홍성현 충남도의장 "도민 삶의 질 향상 위해 협력자로"
  2. [중도일보 창간74년]오존층 파괴 프레온 줄었다…300년 지구 떠도는 CO₂ 차례다
  3. [한성일이 만난 사람 기획특집-제99차 지역정책포럼]
  4. [창간74-AI시대] 대전 유통업계, AI 기술 연계한 거점 활용으로 변화 필요
  5. [창간74-AI시대] AI, 미래 스포츠 환경의 판도를 재편하다

헤드라인 뉴스


대전어린이재활병원 국비확보 또 ‘쓴잔’

대전어린이재활병원 국비확보 또 ‘쓴잔’

대전시가 2026년 정부 예산안에서 역대 최대인 4조 7309억 원을 확보했지만, 일부 현안 사업에 대해선 국비를 따내지 못해 사업 정상 추진에 빨간불이 켜졌다. 공공어린이재활병원 운영비와 웹툰 IP 클러스터, 신교통수단 등 지역민 삶의 질 향상과 미래성장 동력 확충과 직결된 것으로 국회 심사과정에서 예산 확보를 위한 총력전이 시급하다. 1일 대전시에 따르면 2026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제외된 대전시 사업은 총 9개다. 앞서 시는 공공어린이 재활병원 운영지원 사업비(29억 6000만 원)와 웹툰 IP 첨단클러스터 구축사업 15억 원..

김태흠 충남도지사 "환경부 장관, 자격 있는지 의문"
김태흠 충남도지사 "환경부 장관, 자격 있는지 의문"

김태흠 충남지사가 지천댐 건설 재검토 지시를 내린 김성환 환경부 장관을 향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지천댐 건설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는 김돈곤 청양군수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선출직 공무원"이라고 맹비난했다. 김 지사는 1일 도청에서 열린 2026 주요정책 추진계획 보고회에서 김 장관에 대해 "21대 국회에서 화력발전 폐지 지역에 대한 특별법을 추진할 때 그의 반대로 법률안이 통과되지 못했다"라며 "화력발전을 폐지하고 대체 발전을 추진하려는 노력을 반대하는 사람이 지금 환경부 장관에 앉아 있다. 자격이..

세종시 `국가상징구역+중앙녹지공간` 2026년 찾아올 변화는
세종시 '국가상징구역+중앙녹지공간' 2026년 찾아올 변화는

세종특별자치시가 2030년 완성기까지 '국가상징구역'과 '중앙녹지공간'을 중심으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전망이다. 1일 세종시 및 행복청의 2026년 국비 반영안을 보면, 국가상징구역은 국회 세종의사당 956억 원, 대통령 세종 집무실 240억 원으로 본격 조성 단계에 진입한다. 행정수도 추진이란 대통령 공약에 따라 완전 이전을 고려한 확장 반영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내년 국비가 집행되면, 국회는 2153억 원, 대통령실은 298억 원까지 집행 규모를 키우게 된다. 국가상징구역은 2029년 대통령실, 2033년 국회 세종의사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갑작스런 장대비에 시민들 분주 갑작스런 장대비에 시민들 분주

  • 추석 열차표 예매 2주 연기 추석 열차표 예매 2주 연기

  • 마지막 물놀이 마지막 물놀이

  • ‘깨끗한 거리를 만듭시다’ ‘깨끗한 거리를 만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