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빚으로 굴러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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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빚으로 굴러가는 사회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 승인 2024-04-01 16:03
  • 신문게재 2024-04-02 18면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양성광 원장
양성광 원장
어릴 적에 어머님이 이웃집 돌담 너머로 매일 같이 돈을 건넨 후 수첩에 그려진 빼곡한 칸에 도장을 받으시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조금 커서는 일수(日收)로 빌린 돈을 갚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학생쯤 되니 우리 집 가계가 농협 자금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봄에 농협에서 대출받아 포도 농사를 지은 후 가을에 갚는 한해살이 경영이었다.

포도를 수확하기 전에 농협 대출금이 다 떨어지면 곤란한 일이 종종 벌어졌다.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고 우리 먹을 거야 어찌어찌 해결했는데, 일꾼에게 줄 품삯이 밀리는 것은 차마 못 볼 짓이었다. 하루는 떠들썩하게 아버지를 찾는 소리에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 아버지는 집에 안 계신다고 했는데도 일꾼 아저씨가 막무가내로 안방으로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급히 안방에서 윗방으로 옮겨 숨으셨는데, 단단히 화가 난 아저씨가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혀 들키고 말았다.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내가 아빠가 되고 보니 들킨 것보다 자식에게 그 모습을 보인 것이 더 속상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일숫돈을 쓰게 된 것이 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쪼들리는 살림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취직하기 전까지 우리 집 가계는 늘 쪼들렸고 빚으로 운영되었다. 그래도 그때의 가난은 내게 좌절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억척스러움을 가르쳐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선물이었다.

우리 가족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활동도 처음엔 원조와 빚으로 시작했다. 빚을 내 학교와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공장을 돌려 전 세계를 누비며 수출하고 악착같이 저축해 마침내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한 나라만 빚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 미국도 부채가 GDP의 1.2배 규모이다. 전 세계의 부채 규모는 2016년 GDP의 2배 규모였는데, 2023년에는 2.9배로 늘었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는 빚으로 굴러간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경제가 성장했다는 것은 곧 빚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빚을 내 자기 자산 이상으로 과감히 투자하는 것을 좋은 말로 레버리지 투자(갭 투자)라고 한다. 이 같은 레버리지 재테크는 잘하면 크게 재산을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큰 수익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2020년대 초 "집값은 안 떨어지잖아요"라며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집을 산 젊은이들은 지금 high-risk에 투자한 대가를 크게 치르고 있다.

기업들도 대책 없이 큰 빚으로 레버리지를 일으켰다 실패하면 대가를 치른다. 부동산 PF 사업은 수천억 원 규모이지만 시행사의 자기자본은 5~10%에 그치고, 나머지는 금융회사의 대출과 분양 대금으로 충당하여 자본금 문턱이 낮다. "사업자금은 남의 돈"이라는 생각으로 너도나도 뛰어드는데, 높은 수익에 눈이 먼 저축은행과 증권사들은 사업성을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대출을 승인해 줘 PF 시행사(2022년 말 기준 2,715개)가 난립했다. 최근에는 부동산 침체로 위험한 PF 사업장이 늘고 있어서 건설 시장의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빚투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에 일부 성공한 신화를 기억하는 젊은이 중에는 언젠가 다시 올 대박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는 빚으로 돌아간다는데, 적당한 레버리지의 투자는 개인에게도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끌 빚투 광풍이 모든 평범한 젊은이에게까지 휘몰아치는 사회가 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나는 평생을 빚은 지지 않으려고 바동거려왔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면서 여러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빚을 많이 진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진 빚은 여자 형제들 많은 집에 아들인 너라도 공부해서 집안을 일으켜야지 하는 분위기로 나만 대학에 진학해서 생긴 누나와 여동생에 진 마음의 빚이었다. 이제 살아갈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는데, 남은 동안 더 이상 빚은 지지 말아야겠다. 그러나저러나 평생 겹겹이 쌓여온 이 빚을 다 어이할까? 무뚝뚝하기만 한 '남의 편'을 그저 참아온 마나님에 대한 빚은 또 어쩔꼬?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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