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경찰을 위한 오답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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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경찰을 위한 오답노트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 승인 2024-10-14 14:00
  • 신문게재 2024-10-15 18면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신기용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얼마 전 보도되었던 일이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붙어있던 전단지를 무심코 떼어버린 여중생이 재물손괴죄로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도된 사실관계를 보면 문제가 된 전단지는 아파트 관리주체의 허락을 받고 붙인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불법 전단지를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아파트 관리소장도 해당 전단지를 떼었다는 이유로 함께 재물손괴죄로 송치됐다고 한다.

누구나 경찰의 이런 결정에 대해 단번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해당 뉴스의 댓글은 경찰에 대한 비난과 성토로 가득했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 경찰의 집 앞에 불법 전단지를 덕지덕지 붙일 테니 떼기만 해보라는 내용이었다.

뉴스만 보았을 때는 변호사의 입장에서도 말도 안 되는 결론임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경찰에서 이러한 결과를 도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에서 송치 결정이 적절하였다는 근거로 제시했다는 판례를 보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공동주택관리법상 적법하게 게시물을 철거하기 위해선 부착한 주체에게 자진 철거를 청구하거나 민사소송을 제기해 강제집행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판례가 이번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동의 없이 게시물이 부착됐더라도 이를 적법하게 철거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인데,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식의 자력구제를 허용하지 않는 우리 법의 태도에 비추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경찰도 판례까지 참고해 가며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모두 경찰의 결론에 납득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분노까지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쉽고 가까운 법률적 단서는 이미 형법 안에 존재한다. 형법에는 재물손괴죄에 대한 규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20조에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돼 있어 애초에 이번 사건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도 될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

여중생이 거울을 가리고 있는 불법 전단지를 떼는 행위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굳이 법률을 공부하지 않아도 그저 상식으로 알 수 있다. 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이기에 화가 나고,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 할법한 행동이기에 더욱 화가 난다.

경찰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방위나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와 같은 규정들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언어로 되어있는 탓에 쉽게 적용하기 어렵다. 법원에서도 잘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함부로 이를 이유로 무혐의 판단을 하다 보면 자칫하다 공정하지 못한 처분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상대방의 이의제기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많은 공감을 받았던 '당신 집 앞에 불법 게시물이 가득하면 어쩌겠냐'는 댓글을 보며 그 경찰도 '당신이 경찰이라면 어쩌겠냐'며 반문했을지 모른다. 경찰만이 아니다, 권한을 발휘하고 재량을 행사하려다 곤혹을 치르느니 책임질 일 만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 한 번쯤 안 해본 공무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정도는 여중생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두고 범죄자의 딱지를 붙이려 하였던 황당한 결론의 핑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법 집행의 가장 우선에 상식이 놓여있어야 한다는 그 상식을 잊은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범죄자로 만드는 일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물며 고작 '면피'를 떠올리며 선량한 여중생을 범죄자로 만드려고 했다면 부끄러워 마땅할 일이다.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헤프닝이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기계적으로 법규정에 사건을 대입해 쉽사리 유죄로 판단하는 일은 너무도 다반사다. 심지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사건이 가볍다며 '죄를 인정하고 선처받으라'고 권유하는 일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조금만 더 당사자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오늘의 문제는 너무도 쉬운 문제다. 초등학생도 풀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맞추지만 소수의 사람이 틀린다. 그 소수의 사람이 오히려 법률 전문가일 가능성이 높다. 상식과 배려의 마음으로 법을 바라보면 조금 오답률이 낮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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