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분판(粉板) 앞에 엎드려 썼던 붓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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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분판(粉板) 앞에 엎드려 썼던 붓글씨

김문수/단국대 명예교수

  • 승인 2025-01-05 10:12
  • 수정 2025-01-05 10:44
  • 신문게재 2025-01-06 1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나라가 어지럽다. 이제 기천인의 하루가 밝아오니, 그동안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열고 계룡본산으로 달려가야겠다. 새해 희망찬 수련날이 기다려진다.

요즘 점차 잊혀져가는 이야기를 남겨두고 싶은 심정으로 졸문을 쓰고 있다. 그래서 먹물냄새가 흠뻑 배어있던 옛날서당 얘기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먹물냄새를 묵향(墨香)이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일랑 잠시 맘속에 접어두기로 하자. 붓글씨를 연습할 종이가 귀하던 시절, 화선지 대신에 사용하던 분판(粉板)에서 밴드 글의 실마리를 찾고 싶은 오늘이다.

맹자는 유이학지 장이행지(幼而學之 壯而行之)라는 가르침을 남겼으니, 어려서는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행한다는 말이다. 어릴 때 올바르게 배운 것을 나이가 들어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후회 없는 날들이 기다리는 법이니, 이렇게 좋은 글귀인데도 읽고 쓰기를 게을리하여 내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까마득하게 높은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홍시를 쳐다보면서 침을 삼키는 거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종이가 귀하던 조선시대에 글씨를 연습하기 위한 도구로 분판(粉板)이 있었는데, 이 분판은 분(粉)을 기름에 개어 널빤지 조각에 발라 반질반질한 광택을 올린 표면에 붓글씨를 쓰고 나서 물걸레로 깨끗이 지우고 또다시 붓으로 쓸 수 있는 도구였다. 유년기부터 내가 사용하던 분판은 표면이 계란 노른자위 빛깔에다 광택이 뛰어나서 소중하게 간직해오다가 고향집을 떠나오는 바람에 분실의 아픔을 겪었다. 경향각지 골동품점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거무스름한 표면의 조잡한 분판들 뿐이라서 너무 실망이 컸다.



나의 분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판이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밝고도 노르스름한 표면의 해맑은 광택미가 눈앞에 삼삼할 따름이다. 아래의 사진과 같이 어둠침침한 어둠침침한 분판표면에 쓰는 글씨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왼팔은 방바닥을 짚고 분판에 엎드려 오른팔로 붓끝에 먹물을 적시던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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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판 사진
분판(粉板)에 붓글씨를 쓰다가도 매년 여름이면 원두막에 올라가 당송시대의 명시들을 모아놓은 당음(唐音)을 독송(讀誦)했건만,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라서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있으니 아쉬움이 남는구나. 고전 시문들을 읽고 쓰면서 심신을 닦을 수 있었으니, 무지몽매한 빡빡머리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나 보다. 선현들의 말씀을 눈과 귀에 담다 보니, 작금(昨今)의 국내 위기상황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은 한문 구절이 뇌리에 스쳐간다.

"간밤에도 전전반측(輾轉反側)의 뜬눈으로 새운 촌로라네."

"거비이후 지등고지위위 처회이후 지향명지태로(居卑而後 知登高之爲危 處晦而後 知向明之太露)"라는 菜根譚(채근담)의 인생지침이 새로운 데, 졸역(拙譯)하면, "낮은 곳에 있어본 후에야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위태로운 일인 줄을 알게 되며, 음력 그믐밤처럼 어두운 처지를 당해본 후에야 비로소 밝은 곳을 향하는 게 너무 눈부심에 노출될까봐 두려움을 깨닫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예의와 염치를 근본으로 살아가던 동방예의지국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좌측을 바라보니 늑대가 으르렁대길래, 우측을 바라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 격이니, 이 나라 민초들은 도무지 좌측도 우측도 믿을 곳이 없어 사면초가(四面楚歌)로구나. 하늘이시여! 선량한 민초들이 애써 일구어놓은 대한민국의 앞날을 서둘러 보살펴 주소서!

國運一髮引千鈞 民草每夜不伸足(국운일발 인천균 민초매야 불신족) 天網恢恢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 불실)

국운은 3만근 무게를 머리카락 한 가닥에 매달아놓은 듯이 위태로우니, 민초들은 밤마다 발을 뻗고 맘 편히 잠들지 못하네. 하늘의 그물은 엉글기는 해도 넓고 넓으니,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은 놓치지를 않으리.

김문수/단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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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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