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분실(紛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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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분실(紛失)

민순혜/수필가

  • 승인 2025-03-05 14:24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시청역에서 걸어갈까 하다가 약속 시간이 임박하기에 지하철을 탔다. 다음 정차역에서 내려야 해서 문 가까이에 서 있는데 앞에 앉은 중년여성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뭐~, 파세요?" 느닷없이 무슨 말인가 해서 되물었다. "네? 뭘 팔다니요?"

그러자 그분은 내 손가방에 있는 3개의 볼펜을 가리키며 물건 판매 다니는 거 아니냐며 궁금해했다. 순간 어처구니도 없었지만 한편 씁쓸했다. 그 3개의 볼펜에 사연이 있어서다. 그 사이 지하철은 다음 역에 도착, 문이 열리고 있어서 그 아주머니한테는 목례만 하고 서둘러 내렸다.

친구와 만나서도 머릿속은 온통 볼펜 생각뿐이었다. 친구는 그런 나를 살피듯 바라보며 무슨 일 있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응, 별일은 아닌데 지하철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내 볼펜을 보고 뭘 팔러 다니느냐고 묻기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얘, 그건 나도 좀 이상했어. 볼펜을 왜 3개씩이나 나란히 꽂았어? 그 아주머니가 가방 속에 있는 책을 상품 설명서로 생각하셨나 봐. 어? 그러게,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책, 네가 사 달라고 한 책인데 가방을 대충 닫았더니 겉표지가 튕겨 나왔네.

하지만 나는 친구와 헤어져서 집에 와서도 기분이 영 석연치가 않았다. 1년 전 볼펜을 잠시 빌렸던 그녀 생각이 나서였다. 사실 그녀와는 20여 년 전 인문 교양 강연을 같이 수강한 적이 있다. 특별히 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문학기행을 가는 일행 속에서 만나니까 반가웠다.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척해서, 나는 기억을 더듬어 가까스로 그녀를 생각해 냈다. 그날은 그렇게 그 옛날에 함께했던 일들을 서로 들춰내며 여정을 즐겁게 보냈다.



그 후 주중 인문학 강연이 있어서 들으러 갔는데 마침 그녀도 왔다. 그러잖아도 같이 가자고 연락하려던 참인데 만나서 반가웠다. 이젠 얼굴도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아 그간의 소식도 나누면서 강연을 들었다. 즐거웠다. 혼자 일 때도 좋았지만, 둘이 있으니 더욱 즐거웠다. 매번 혼자 다니다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같이 하니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그날 강연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고 막 일어서려는데, 주체자 측에서 출석 명단을 갖고 왔다. 서명해달라고 했다. 나는 이미 손가방을 다 닫고 일어서려고 하던 참이어서 망설이는데 마침 그녀가 볼펜을 꺼내 서명했다. 나도 그녀의 볼펜을 잠시 빌려서 서명하고 나왔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녀한테 전화가 왔다. 그날은 청탁 원고 에세이를 한 편 써야 해서 만사 제치고 노트북과 씨름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폰에 그녀의 이름이 떴다. 반가웠다. 하지만 수다를 피우기는 시간이 적절치가 않았다. 그렇더라도 잠시 안부만 묻고 다음에 만나자고 하려고 전화기를 귀에 댔다.

"작가님,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로 후벼 파 듯한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귓전을 쏘아댔다. "그렇게 시치미 딱 잡아떼면 모를 줄 알아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이고, 저렇게 시치미를 딱 떼는 것 좀 봐!"

내가 그녀에게 잠시 빌렸던 볼펜이 없어진 것이다. 그녀는 내가 가져갔다고 확신한 것 같았다. "아니, 그러면 그 즉시 전화를 하셔야지요. 한 달이나 지나서 왜 이제야 전화하셨어요?"라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훔쳐 갔으면 내놓을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며 흥분해서 말하는데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낯선 동네에서 오다가다 만난 사이도 아니고 우리는 그래도 수준 있는 인문학 강연을 수강하며 만난 사이인데, 만일 내가 훔쳐 갔더라도 언어 순화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세상에 막무가내로 설치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볼펜을 사주기로 했다. 그 볼펜이 굉장히 비싼 것이라고 말하기에 모델명을 알려주면 똑같은 것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모델명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침 내게 고급 볼펜이 많으니, 그중에 선택하라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렇게 해서 고급 볼펜을 선물 아닌 선물을 했다. 고급 볼펜이지만 내가 사용하지 않아선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 후 그녀는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해서 오히려 내가 어색했다. 내가 도둑으로 의심을 받다니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말이다.

어릴 적 감명 깊게 읽었던 아르투어 슈니츨러 작 독일 소설 '눈 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을 다시 찾아 읽었다. 형 깔르로는 어릴 때 활 장난을 하다가 실수로 동생 제로니모의 눈을 멀게 했다. 형은 눈 먼 동생을 극진히 돌봤다. 형제는 겨울이 되면 남쪽 나라로 이동한다, 구걸하며 이동했다, 동생이 기타를 들려주고 형은 여행자가 던져 준 동전을 모아서 잠자리와 끼니를 해결했다.

하루는 여행자가 5프랑짜리 은전 한 닢을 형 깔르로에게 줬다. 깔르로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며 동생에게도 그 여행자가 돈을 많이 줬다며 고맙다고 인사하라고 한다. 잠시 후 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여행자는 제로니모에게 다가가 거짓말을 한다. 자신이 형 깔르로에게 이십 프랑짜리 금화를 주었다며 속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제로니모는 형을 믿지 못하고, 형은 사랑하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돈을 훔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심을 받는 것 또한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지독한 슬픈 일 것이다. 사실 나는 볼펜 도둑으로 의심받은 이후부터 손가방에 볼펜을 서너 개씩 꽂고 다닌다. 손가방에 볼펜을 여러 개 꽂고 다녀선지 행인들이 지나다가 한참씩 보고 가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유쾌하지는 않다.

민순혜/수필가

민순혜 수필가
민순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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