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옥도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쳐야만 훌륭한 그릇으로 만들 수 있듯이 인격도 배움을 통하지 않고서는 완성이 될 수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기르고 한편으로 세상을 기르는데 교학(敎學)의 공(功)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예기에서는 윗글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록 아름다운 안주가 있어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고, 비록 지극한 도가 있어도 배우지 않으면 그 선(善)함을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배워본 뒤에 자신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쳐본 뒤에 자신의 곤(困)함을 알 수 있으니, 부족함을 알면 스스로를 반성할 줄 알고 곤궁함을 알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말하는 것이니 『서경.열명』에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다[敎學半]’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하였다. 배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을 배우자는 것인가? ‘배울학(學)’자는 구(臼)+효(爻)+갓(?)+자(子)의 합성어다. 자식이 갓 위에 절구통을 얹어놓고 효를 찧는다는 뜻이다. 즉 효(爻)를 배운다는 뜻이니 변화하는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가르칠교(敎) 역시 효(爻)자가 들어 있으니 모두가 변화하는 도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교(敎)자를 좀 더 살펴보자. 글자가 ‘?(칠복)+(爻+子)’로 구성되어 있으니 복(?)은 점[卜]을 손(又: 手의 약자 형태)에 들고서 가르치는 모습이며, ‘爻+子’는 자식이 아래에서 본받는 모습이다. 가르침이 배움의 반이라 할진대 ‘가르칠교(敎)’자를 古文에는 ‘學+?’의 합성자로 쓰고 있다. 글자 자체에 가르치고 배우는 두 가지 뜻을 겸비하고 있으니 가르침 역시 배움의 기초 위에서 펼쳐지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학문(學問)의 정의가 『주역』에서 나온다.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별한다[學以聚之 問以辨之]’했으니 만 가지를 배워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학(學)의 의미라면, 한 가지를 질문해서 만 가지로 나누는 것이 문(問)의 뜻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물어서 옥 같은 군자의 덕을 이루기를 바라고, 평생 학문을 통해서 성인을 공을 쌓으려는 것이 바로 배움의 목적이라 하겠다.
산 아래에서 이제 막 솟아나온 물을 천(泉)이라 한다. 백(白)+수(水)의 합성어니 아직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의미한다. 이 샘물[泉]은 비록 근원이 짧고 세가 여리지만 그치지 않고 계속 아래로 흐른다면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에 이를 것이다. 공자는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물이여 물이여[水哉水哉]”하며 자주 칭찬하였다 한다. 『맹자』는 이를 두고 “근원이 좋은 물이 용출해서 밤낮을 그치지 아니하여 구덩이를 가득 채운 뒤에 전진해서 사해에 이른다는 것이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했다. 사람의 배움도 이와 같이 그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지금은 당장 무지몽매(無知蒙昧)하겠지만 성인의 경지가 멀리 있겠는가? 안자(顔子)가 말한 바와 같이 “요임금은 누구고 순임금은 누구인가?[堯何人也舜何人]”다. 나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인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주역학자ㆍ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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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국 주역학자·원광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