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삼년 전에 2박 3일로 전남 영암에 다녀 온 일이 있다. 월출산 등산은 물론, 여러 곳을 살펴보았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한 곳이 월출산기찬랜드이다. 가야금산조테마공원, 한국트로트가요센터, 조훈현바둑기념관, 곤충박물관 등과 함께 각종 유락시설이 있었다.
한옥으로 지어진 가야금산조기념관도 이색적이고 아름다웠다. 전시장 구성이 잘 되어있는 탓이겠지만,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인다. 산조(散調)는 기악 독주곡이다. 3~6개의 장단으로 구성된다. 영암 출신의 거문고 명인 김창조(金昌祖 1856 ~ 1919)선생이 1883년 처음으로 가야금 산조를 창제하였다. 산조음악의 효시가 된다. 이어서 거문고산조 · 대금산조 · 해금산조(奚琴散調) 그리고 1950년경 아쟁산조(牙箏散調) 순으로 등장한다. 월출산을 오르며 물의 흐름이 빨라지듯, 진양조로 시작하여 단모리로 끝난다. 진양조 · 중모리 · 중중모리 자진모리가 주로 쓰이지만, 산조의 종류나 바디에 따라 엇모리 · 굿거리 · 휘모리 · 단모리 등의 장단이 가감되기도 한다. 자연과의 동화, 화합이기도 하고, 가사 없는 판소리라 부르기도 한다. 전시관에는 가야금 및 산조음악, 김창조선생의 손녀 김죽파(金竹坡, 1978 중요무현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현재의 국가무형유산 양승희(梁勝姬, 2006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명인도 소개되어 있다.
양승희 명인은 1948년생이다. 어머니가 무용이 좋아 당대의 명무였던 최승희(崔承喜, 1911~1969)를 흠모한 나머지 이름도 똑같이 지어주었다 한다. 5살 때부터 무용과 국악을 공부하였으며 가야금도 배우게 된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여 서울대 국악과로 진학한다. 훌륭한 교수를 만났을까? 지도교수가 자신의 수준을 넘어섰다며 김죽파 선생을 소개한다. 1970년 김죽파 선생을 만나 20년 동안 사사 받는다. 심지어 김죽파 명인은 양승희의 모친을 만나 딸을 결혼 시키지 말라고 요청한다. 뛰어난 예술가가 마음껏 연주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탓이었으리라. 결혼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손해지만 국가적 손실이라 주장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 그만 남자 친구가 생기고 만다. 결혼하게 되자 다시 시부모를 찾아간다. 연주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 달라 설득한다. 시부모 역시, 우리는 아들 하나 얻으면 그만이라며 여러모로 배려하고 돕는다. 심지어 해산하고 일주일 만에 선생에게 달려가 가야금 연주에 매달린다.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가이지만, 정작 본인은 성에 차지 않는다. 득음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새로이 판소리 공부를 10여 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적 쾌감,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한다.
학술적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아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지난해 방송에서 공자와 장자의 예술사상에 대해 "공자의 예술사상은 위인생이예술(爲人生而藝術)로 인생을 위한 예술이다. 예술을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것이요, 규범을 찾고 모범적 인생 영위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장자는 위예술이예술(爲藝術而藝術)로 진정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려면 예술만을 위한 예술이 중요하다. 예술이 신의 경지, 지고지순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며, 죽파 선생의 가르침이 장자의 예술론에 부합한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각고 노력이 어디 양승희 명인뿐이랴. 어느 것 하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어지는 것은 없다. 부단한 열정의 산물로 예술가가 탄생한다. 그런 예술가에게 기생, 기생놀이라고 폄하해 한동안 떠들썩했다. 물론, 기생이 나쁜 말은 아니다. 본래 전문 종합예술인에 대한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보아 접대부로 부른 것이요, 비아냥거린 것이 분명하다. 설렁설렁 살아온 백수건달의 눈에 다른 사람의 피땀 어린 삶이 보일 리 없다. 세상 어느 것도 혼과 땀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 존중받아야 하고 존중해야하는 이유다. 존중이 없는 사회는 피폐해진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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