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덕숭산과 수덕사.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덕숭산(德崇山)은 예산 덕산온천 인근에 있는 해발고도 495.2m로 솟아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덕숭산에는 기암괴석이 풍부하여 바위들이 사람의 두개골이나 노적가리, 사나운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 절묘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덕숭산은 이 지방 현인들이 모여 수양을 하다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여 한때 수덕산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 덕숭산 산자락에 수덕사가 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제 7교구인 수덕사(修德寺)는 5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는 천오백년 고찰이다.
현재는 8대 총림(叢林)이 있다.
총림(叢林)은 선원(禪元), 강원(講院 : 승가대학 또는 승가대학원), 율원(律院 : 율학승가대학원) 및 염불원을 갖추고 본분종사인 방장의 지도하에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을 말한다.
수덕사(修德寺)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하는 등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다.
수덕사는 '수덕사의 여승'으로 더욱 전국에 알려 졌다.
수덕사의 여승은 수덕사(修德寺)환희암(歡喜庵)에 계시던 일엽(一葉) 스님이 그 주인공인데, 원래 이름은 김원주 였지만 일엽(一葉)이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필명으로 지어준 것이다.
김원주는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여 나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 났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 의 대중가요로 불리는 '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명이요, 또 한분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명이고,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이다.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나혜석은 사랑에 버림을 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일엽(一葉 1896∼1971))스님은 극심했던 남존여비의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은 당사자다.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하는데, 남자는 의족을 한 장애인 이었다.남자가 이 사실을 숨기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신뢰에 기반 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일찌감치 청산하고 한국최초 여자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여기서 또 규수제국대학생인 일본인 '오다 세이 조(太田淸藏)'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오다 세이 조'는 아버지를 은행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었다.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이후 고국에 돌아 온 일엽은 친구의 애인과 삼각관계에 빠지는 등 몇몇 사람들에게 사랑의 유혹에 빠지지만 결국 속세를 훌훌 털어버리고 33세에 출가하여 수도 생활에 들어간다.
수덕여관 뒤뜰 암각화.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나혜석이 수덕사에 머물면서 스님이 되기 위해 수덕여관에 5년간 머물면서 주지스님의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하고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다 1948년 서울 은평 서울시립병원 무연고 병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엽스님의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당시 그 일로 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어린 아들은 수덕사를 찾아 왔지만, 일엽스님은 불자가 되었으니, "속세에서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고 한다.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 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 1904~1989)화백은 선배누님처럼 정이 든 나혜석이 이 곳을 떠나자 '수덕여관'을 아예 사 버린다.
그 후 나혜석의 영향을 받은 이응노는 1958년 21세 연하의 연인과 파리로 유학을 떠나 1967년 동백림간천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되어 이 곳에 와 1년간 머물면서 뒤 뜰의 바위에 암각화를 새기고 다시 프랑스로 훌쩍 떠난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의 부인 박희귀 여사가 암각화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면서 여관을 운영하다 2001년 91세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한다.
필자는 선배가 근처에서 식당을 하고 있어 1987년에 수덕여관에 하루 묵으면서 선배로부터 이응노 화백과 암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구한 시절 여인들의 사랑과 한이 녹아 있는 덕산의 덕숭산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둘러보며
잠시 '수덕사의 여승'을 떠 올린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송춘희가 부른 이 노래의 주인공이 된 일엽스님의 인생이 비구니로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 이다.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 김문응 작사가는 당시 세간에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었던 춘원 이광수와 일엽스님의 출가 전 사랑 이야기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응노 화백이 작품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우물 ·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 1,504㎡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수덕사와 수덕여관을 둘러보고 산채음식으로 알려 진 덕산면 수덕사안길37 수덕사집단시설지구 도로 양옆에 즐비하게 늘어 선 산채정식 집들을 둘러보았다.
예산군의 동쪽에는 차령산맥이, 서쪽에는 가야산맥이 남서쪽으로 달리고 있어 동부와 서부는 산지를 이루며, 중앙부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동부에는 도고산(道高山)[482m]·덕봉산(德鳳山)[473m]·봉수산(鳳首山)[534m], 서부에는 수덕산(修德山)[495m]·서원산(書院山)[473m]·가야산(伽倻山)[678m] 등이 솟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수덕사집단시설지구에 가면 각종 말린 산채를 파는 가게들과 산채정식집들이 많다.
집집마다 너도나도 방송에 소개되었다고 간판에 쓰여 있다.
청정한 덕숭산 자락에서 채집한 산나물들로 맛있는 반찬을 마련해 상차림을 한 것 같다.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은『동명집(東溟集)』에 "對案皆山菜(대안개산채)밥상 위의 반찬 모두 산나물이고, 逢人半野談(봉인반야담)사람 만나 하는 말은 시골 얘기네"이라고 했으며, 태조 때는 산나물로 종묘에 천신하였고, 성종 때는 '여러 고을에서 진상하는 산나물[山菜]과 고사리를 자수궁(慈壽宮)·영수궁(寧壽宮)·수성궁(壽成宮) 세 궁(宮)에는 영구히 면제하고 다섯 전(殿)에는 금년을 한하여 임시로 면제하라.'는 전교가 내려 갔다.
거북이 식당. (사진= 김영복 연구가) |
필자는 수덕사집단시설지구 내 산채정식집 중에 '거북이식당(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37-1)을 찾았다.
이 집은 식사가 나오기 전에 잔치국수가 조금 나온다.
돌솥밥은 물론 전(煎)과 도토리묵과 어리굴젓과 잡채, 검은콩두부, 마, 물김치, 청경채무침과 올갱이무침, 조기구이, 버섯구이, 산채나물 등 각종 반찬이 상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나온다.
특히 덕산에 옛날부터 유명한 더덕구이가 알맞게 구워 나와 은은한 향이 입맛을 돋우어 준다.
한편 직접 담은 고추장과 된장을 이용해 음식을 하는데, 된장찌개 역시 구수하니 맛이 있었고 불고기 역시 감칠맛이 도는 것이 맛이 있었다.
거북이 식당 산채정식.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점심을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길에 '덕산온천'에 들렀다.
예산군 덕산면 사동리를 온천골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율곡선생의 저서인 『충보』에 의하면 학 한 마리가 논 한가운데서 날아갈 줄 모르고 서 있기에 동네 주민들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날개와 다리에 상처를 입고서 논의 물을 열심히 상처에 찍어 바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기를 3일간 계속한 후 그 학은 상처가 나아 날아갔는데 이를 이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학이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따뜻하고 매끄러운 물이 솟아나고 있어 그 후로 이곳을 약수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온천은 피부병, 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조선후기 문신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지은 『희암집(希菴集)』에 경종 1년(1721) 6월에 창질(瘡疾)로 덕산온천(德山溫泉)에 다녀왔다고 나온다.
이후 덕산온천은 1917년 일본인 안정(安井)에 의하여 처음으로 탕을 이용한 온천으로 그 모습을 갖추었다.
덕산 온천지구는 법 제정 전 온천이 발견되어 1991년 온천원 보호지구로 지정되었다.
덕산온천은 쥐라기 화감암체에서 용출되는 알칼이성 온천이다.
현재는 온천공의 수가 42공이며, 1일 채수량이 9,370㎥에 이른다. 온천의 수온은 최고 47.7℃이고, 수질은 약알카리성 중탄산나트륨천(Na·HCO3)이며 게르마늄 함량이 0.017㎎/ℓ으로 근육통·관절염·신경통·혈관순환촉진 등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이번 '맛있는 여행'은 볼거리 먹을거리는 물론 개운하게 온천욕도 즐긴 행복한 힐링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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