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게장.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조선 전기의 시인, 작가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금오산(金鰲山)에서 지은 조선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 곽개사(廓介士)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귀한 손님들을 위해 모두 각기 재주를 보이는 것이 어떠한가?"
자칭 곽개사(廓介士)가 발굽을 들고 비스듬한 걸음으로 나와서 말했다.
"제 속은 누렇고 밖은 둥글며 굳은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가졌습니다.
재미와 풍류는 장사(壯士)의 낯을 기쁘게 해 주고 곽삭(郭索)한 꼴은 부인들에게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내 마땅히 다리를 들고 춤을 추어 보겠습니다."
곽개사는 눈을 부릅뜬 채 사지를 흔들면서 앞으로 나갔다가 뒤로 물러섰다가 하며 팔풍무(八風舞)를 추었다. 민좌의 손님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물론 게[蟹]를 비유로 쓴 내용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는 게[蟹]는 산 좋고 물 좋은 청양군(靑陽郡)의 특산물 중에 하나다.
청양군의 명산(名山) 칠갑산(七甲山 : 559.8m)은 정산면(定山面)과 장평면(長坪面)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차령산맥의 줄기로 한티(大峙)고개를 지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덕봉(大德峰 : 472m), 명덕봉(明德峰 : 372m), 정혜산(定惠山 : 355m) 등과 이어진다.
참게 매운탕.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이 잉화달천(仍火達川) 흐르며 7곳의 명당이 만들어 져 칠갑산(七甲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도 한다.
특히 칠갑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맑은 물은 어울하천, 작천, 지천, 금강천이 협곡과 아름다운 산수경을 이루며 흐르는데 물굽이가 기묘하고 기암괴석이 아름다워 지천구곡이라 한다고 한다.
이처럼 산수가 수려한 청양군의 계곡과 하천(河川)는 조선 초 부터 민물게[蟹]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 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656년 실학자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전국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보면 청양현(靑陽縣)의 토산(土産) 중에 게[蟹]가 나온다.
뿐만아니라 구한말 문신이었던 오횡묵(吳宖默, 1834~1906)이 제작한 세계와 조선의 지리서로 학부 지리교과서였던『여재촬요(輿載撮要)』에도 청양현(靑陽縣)의 토산(土産)이 게[蟹]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양에서의 게[蟹]는 조선 전기부터 말까지 변함없는 특산물이었던 것 같다.
참게 매운탕. (사진= 김영복 연구가) |
게는 갑각류로 무서운 집게다리를 가진 추한 벌레와 같다고 생각했다.
특히 논두렁에 구멍을 내고 사람을 물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이 털게들을 '사람을 꼬집는 벌레'(夾人)라고 부르면서 무척 겁내게 되었다.
이렇듯 털게로 인한 강남 지역 중국인들의 고충을 해결한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우 임금인데, 중국 역사상 최고의 치수 전문가였던 우왕(禹王)이 강남을 개발하면서 당시 강남지역 치수를 위해 힘이 장사(壯士)였던 파지에(巴解)라는 인물을 양청후 지역책임자로 파견하였다. 파지에(巴解)는 현지 백성들을 이끌고 물길을 내는 공사를 지휘하였다.
파지에(巴解)는 매일 공사를 하면서 어느 날 밤이 되자 공사장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았는데 불빛을 보자 '사람을 꼬집는 벌레'들이 수없이 몰려들며 입에서 허연 포말을 품어대며 모닥불로 몰려들었다. 밤새 이들을 저지를 하느라 공사장은 잠을 못잘 정도였다. 그러나 날이 밝자 '사람을 꼬집는 벌레'들은 속속 물로 되돌아갔다.
그렇지만 많은 일꾼들은 살점이 꼬집혀서 피가 나고, 상처 가 나있었다.이처럼 '사람을 꼬집는 벌레'의 계속되는 공격은 치수 공사를 심각하게 방해하였다. 이에 파지에는 이를 퇴치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일꾼들을 불러 토성을 쌓고 성 주변에 도랑을 깊이 파서 저녁이 될 때를 기다려 토성 위에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도랑에서 물을 빼버리자 '털게'들이 기어올라 왔다가 타죽게 되었다. 도랑에는 죽은 벌레들이 쌓여갔고 불에 탄 털게는 색깔이 온통 빨갛게 변해서 산처럼 쌓였다.그런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공사 책임자였던 파지에가 이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한 마리를 껍질을 벗겨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향내가 사방에 진동하였다. 파지에가 한입을 깨물어 먹어 보았다. 그런데 이 흉측한 벌레가 너무도 부드럽게 씹히는 것이 아닌가 파지에는 털게 한 마리를 다 먹고 다시 한 마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를 본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따라서 털게를 먹게 되었다.맛있는 털게에 대한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을 괴롭히는 해충이 일순간에 멋진 음식재료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천하에서 처음으로 먹어본 파해를 용감한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그리고 파지에(巴解) 그의 이름인 해(解)자 밑에 벌레 충을 붙여 민물 게를 의미하는 해(蟹)자로 사용하면서, 민물 게를 최초로 먹은 인물로 기리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더욱이 '따자시에'로 유명한 마을인 빠청쩐(巴城鎭)도 파지에(巴解)라는 인물을 기념하여 명명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청양은 바다와 먼 내륙지방으로 청양에서 나는 게[蟹]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모두 참게를 말한다.
참게는 개천(開川)에서 사는 게를 말하는데,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면 '천해(川蟹)'라고 하며 천해(川蟹)는 게 중에서도 가장 맛이 좋다 하여 '진해(眞蟹)'라 하였다. 이 '진해(眞蟹)'를 순우리말로 '참게'라고 불렀던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천주교인인 손암(巽庵)정약전(丁若銓1758~1816)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저술한 수산 박물지인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참궤'라 하여 형태와 생태 및 잡는 법이 적혀 있으며, 참게는 몸이 검푸른 빛을 띠고 있으며, 수놈은 털이 수북한데, ....게 중에 맛이 가장 좋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일반적으로 게 하면 참게를 뜻했고 참게가 꽃게 보다 더 유명했다.
조선 후기 학자인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가 남긴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중 동물을 기르고 사냥하는 방법을 정리한 전어지(佃漁志)』에도 게를 잡는 방법을 적었고, 지금의 밤섬 근처인 농암(籠巖)에 살면서 지금의 노량진 일대 한강의 팔경을 담은 『풍석전집(楓石全集)』「부용강집승시서(芙蓉江集勝詩序)」중 만천해등(蔓川蟹燈)편에는 만천(지금의 용산구 원효대교 북단에 닿는 한강의 지류 하천)에서 밤에 등불을 켜고 게를 잡는 풍경을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게막. (사진= 김영복 연구가) |
참게를 잡기위한 게막은 냇물이 넓고 50㎝ 이하의 얕은 물속에 친다. 대나무를 수면 위로 30㎝ 이상 올라오도록 길게 자른 뒤, 하천을 가로질러 비스듬하게 쳐 둔다. 물이 내려가는 방향으로 발을 친 끝부분에 통발을 설치하거나, 발을 냇둑 가까이까지 치고 공간을 조금 남겨 둔다. 참게가 냇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나무 발을 만나면, 발을 따라 비스듬하게 내려와 통발에 걸린다. 통발을 치지 않은 곳에는 그릇을 놓아 잡는다. 냇둑과 발 사이의 빈 공간에는 흰돌을 깔아 두어 검은색의 참게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 둔다. 산란 후 성장을 위해 강으로 올라온 게는 주변의 논이나 작은 개울가에서도 발견된다. 게가 성장해 하류로 내려갈 즈음이 되면 논의 물꼬 주변이나 작은 개울에서 참게를 잡는다. 이때는 발을 설치하지 않고 구멍이 뚫린 그릇으로 떠낸다.
18세기 말~19세기 초 다양한 백과사전이 나오던 시기에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가정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엮은 실용적 백과사전『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게의 보관법과 게젓 담그는 법, 굽는 법, 게찜요리 등이 나온다.
청양군은 장평면 미당리 도림천과 천장호수 아래 정산면 와촌리 잉화달천(仍火達川)에 2004년 6월11일 참게 종묘를 방류한 적이 있다.
한편 청양군에는 구전민요로 게의 노래가 있고 이 노래를 게시한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게야 잡아라, 게야 잡아라, 밥해 줄께, 얼은 놓아라. 게가 나온다 잇밥 하여라, 거랑방이 나온다, 조밥 하여라."
예부터 잉화달천(仍火達川)과 지천구곡 등 맑은 계곡과 하천에는 민물 게, 즉 참게들이 많이 잡혔다고 한다.
지금도 청양에는 두 군데 민물 게를 이용해 요리를 해 주는 맛 집들이 있다.
장곡사. (사진= 김영복 연구가) |
맛 집을 찾기 전 칠갑산골 부근에 있는 장곡사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마곡사의 말사(末寺)인 장곡사(長谷寺)는 신라 문성왕 12년(850년)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사찰이다.
한편 장곡사는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국보 제58호), 미륵불괘불탱화(국보 제300호), 상하대웅전(보물 제162호·제181호), 철조비로자나좌상부석조대좌(보물 제174호), 금동약사여래불좌상(보물 제337호), 설선당(유형문화재 제273호) 등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 절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한 사찰에 대웅전(大雄殿)이 둘이 있는 절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지 않고, 처음 만나는 하(下)대웅전에는 약사불이 모셔져 있고, 상(上)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약사불은 일념으로 기도하면 난치병이 낫는 가피력(加被力)을 지닌 영험 있는 부처님으로 유명하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장곡사 경내를 구경하다 시장하면 근처 '칠갑산골'에서 '참게매운탕'으로 식사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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