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칼럼] 왕죽구(王竹丘)

  • 오피니언

[문화人 칼럼] 왕죽구(王竹丘)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 승인 2025-10-22 16:46
  • 신문게재 2025-10-23 19면
  • 김지윤 기자김지윤 기자
2025091001000915400037451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대나무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선비들이 추구했던 굳건한 지조와 절개를 상징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동료와의 신의를 지키며 임금에게 충성해야 했던 선비들이 바로 대나무의 곧은 모습을 자신에게 비춰보며 본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지는 추운 겨울에도 대나무는 늘 푸른 잎을 유지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선비들은 대나무를 어떤 시련 속에서도 변치 않는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덕(德)과 학식을 갖춘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君子)'의 인품에 비유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지만 곧게 뻗어 올라간다. 선비들은 속이 빈 것을 겸손함과 비워냄으로, 곧게 뻗은 것을 강직함과 높은 기상으로 여겨 대나무를 사랑했다. 이렇게 대나무는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꼿꼿한 절개나 의리 등 이상적인 인간상을 담은 중요한 상징이었다.

'왕죽구'는 현재 대전 동구 가양동 박팽년의 생가가 있던 곳의 옛 지명이다. 왕대(王竹)라는 종류의 큰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1668년(현종 9)에 세워진 박팽년의 유허비가 있다. 비문은 노론의 영수이며 성리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우암과 함께 서인에 속하며 예학에 밝고 문장에 능했던 동춘당 송준길이 글을 썼다. 숙종의 장인이며 경서에 밝던 여양부원군 민유중은 두전(頭箋)글씨를 썼다. 이 비문의 내용을 보면 "생각건대 이 흥룡촌(興龍村)의 왕죽구(王竹丘)는 회덕현(懷德縣) 치소(治所)의 남쪽 경계인데,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고(故) 평양(平陽) 박선생(朴先生) 팽년(彭年)의 유지(遺址)이다.'고 한다." 이렇듯 왕죽구인 흥룡촌은 현재 동구 가양동 우암사적공원 인근의 골목길 주택가를 지칭한다.

우암사적공원 경내 이직당이 있는 곳은 정절서원이 있던 터이다. 정절서원은 1684년(숙종10)에 지방 유림이 송유, 박팽년, 송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01년에 김경여와 송상민, 1822년(순조22)에 송국택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에 훼철된 뒤로 복원하지 못하였다. 『옥오제집』에는 정절서원 박팽년 선생 봉안 제문에 "살펴보건대, 이곳 죽구(竹丘)는 선생의 유허(遺墟)이니 정자와 연못, 숲과 샘물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중략- 생각지 않은 화재로 갑자기 불에 탔습니다. 천막을 치고 제향을 모시니 의식이 법도에 맞지 않기에 이건 하기로 하니 옛터의 동쪽입니다. 그 동쪽엔 무엇이 있습니까. 물과 돌이 있습니다. 이곳을 거니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합니다." 이렇듯 박팽년의 유허와 정절서원이 있던 왕죽구는 주택가에 자리한 유적지가 아니라 물과 돌과 샘이 있고 왕대나무가 자라던 절개와 의리를 상징하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인 60~70년대 초만 해도 왕죽구로 불리던 이곳은 더퍼리라 불리던 전통 마을이 있었다. 마을 논 가운데 유허비와 그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서 동네 아이들은 멱을 감고 놀았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 유허의 못은 메워지고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었다. 정절서원이 있던 남간정사 인근도 옛 경관을 모두 잃어버렸다. 왕대나무가 무성했던 언덕이 있던 마을은 주택가로 변했고, 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해마다 마을 벚꽃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화려한 꽃보다는 꼿꼿한 절개와 의리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소나무 등이 더 어울려 보인다. 마을의 땅이름은 그 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가치, 정체성 및 마을 공동체의 소속감을 형성하는 문화적 특성을 드러낸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을 공동체의 행사에 있어서 지역의 땅이름에 대한 공동체의 심사숙고가 필요해 보인다.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아산으로 힐링 가을여행 오세요"
  2. 대전 유성 노인회서 견학갔다가 80대 실종 9일째…인력 600여명 투입 '희망을'
  3. 대전A고 학교운영위원장 교권침해? 24일 '교보위' 촉각
  4. 대전경찰청, 제80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개최
  5. [S석 한컷]서포터석에서 탐탐이 치는 K-리그 기자! 음치-박치-엇박자 서포터 현장팀 체험
  1. 프로야구 티켓 매크로 대량구입 암표되팔이 20대 '체포'
  2. [사설] CTX 개통 앞당길 방안 찾아야 한다
  3. 기계 정식용 양파 모종, 노지서도 안전하게 키운다
  4. [사설] 세종경찰 '빈약한 여건' 개선해야
  5. 대전가톨릭가정.성폭력통합상담소 젠더기반폭력 근절 캠페인

헤드라인 뉴스


24일 대전시 국정감사에 쏠린 눈… `창 대 창` 대결 승자는?

24일 대전시 국정감사에 쏠린 눈… '창 대 창' 대결 승자는?

24일 진행되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대전시 국정감사에 정치권 시선이 쏠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인 박정현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감사위원들과 국민의힘 이장우 대전시장 간 치열한 공방이 예상되는 가운데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감장에서 벌어지는 전초전에서 누가 기선을 잡을지 주목된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24일 대전시청을 찾아 대전시를 상대로 국감을 진행한다. 이날 대전시 국감은 지방 1반이 담당한다. 신정훈 행안위원장이 감사반장을 맡고, 감사위원으론 민주당 6명, 국민의힘 3명, 조국혁신당 1명의 의원이 참여한다. 지..

"우주항공산업진흥원, 대전에 설립돼야"
"우주항공산업진흥원, 대전에 설립돼야"

국가 우주항공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전담기관인 우주항공산업진흥원이 설립 예정인 가운데 대전시가 우주항공청을 방문해 유치전에 나섰다. 최성아 대전시 정무경제과학부시장은 22일 경남 사천 우주항공청을 방문해 노경원 차장을 만나 우주항공산업진흥원 대전 설립과 우주기술혁신 인재양성센터 인력양성사업 국비 지원 등을 건의했다. 우주항공산업진흥원은 정책개발, 기술이전 및 사업화, 창업 및 해외 진출 지원 등 국가 우주항공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전담기관으로, 우주항공청이 9월 공청회를 통해 설립 추진을 공식화한 바 있다. 우주항공산업진흥원 설..

유류세 인하 올 연말까지 연장… 인하 폭은 휘발유 3%, 경유·LPG 5% 축소
유류세 인하 올 연말까지 연장… 인하 폭은 휘발유 3%, 경유·LPG 5% 축소

정부의 한시적 유류세 인하 조치가 오는 연말까지 두 달 더 연장된다. 다만 인하 폭이 축소되면서 다음 달부터 휘발유는 25원, 경유는 29원가량 오를 전망이다. 기획재정부는 22일 이 같은 내용의 '교통·에너지·환경세법 시행령'과 '개별소비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1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10월 31일 종료 예정이었던 유류세 인하 조치는 12월 31일까지 연장된다. 기재부는 "유가 및 물가 동향, 재정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며 "국민의 유류비 부담이 급격히 늘지 않..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상서 하이패스 IC 23일 오후 2시 개통 상서 하이패스 IC 23일 오후 2시 개통

  • 한화이글스 우승 기원 이벤트 한화이글스 우승 기원 이벤트

  • ‘최고의 와인을 찾아라’ ‘최고의 와인을 찾아라’

  • 제80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제80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