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 우리도 가해자였다

  • 오피니언
  • 우난순의 필톡

[우난순의 필톡] 우리도 가해자였다

  • 승인 2019-08-14 10:18
  • 수정 2019-08-14 15:46
  • 신문게재 2019-08-15 14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전쟁
여성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쟁은 무엇인가. 모든 문화는 전쟁을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나라를 위해, 동포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용감하고 강한 전사는 이상적인 남성상이었다. 전쟁에 관한 담론은 오로지 남성만을 위해 존재했다. 전쟁이라는 것은 남자다움 그 자체인 것이다. 아마조네스가 전투하는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유방을 잘라낸 것은 전쟁은 여성적인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여성은 출산과 양육을 수행하고 수동적·헌신적이어야 했다. 이것은 남성중심의 지배계급사회에서 부수적인 일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가정과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을 부여하고 남성에게는 일과 의사결정이라는 공적 영역을 지시한다.

남성들이 벌이는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게 하는 전쟁은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래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런데 남성들을 위한 전쟁에서 정작 피해자는 여성의 몫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죽어가고 강간당하고 있을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 때 세르비아 군인들이 이슬람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한 사실은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허나 아랍의 봄 이후 중동 국가에서 외신 기자와 자국민 여성이 성폭행 당하고 시리아 여성들이 참혹한 상황에 처했지만 전쟁이라는 거대 담론에 파묻혀버렸다.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진이 있다. 1985년 내셔널지오그래픽 표지 사진을 장식한 아프간 소녀를 기억하는가. 초록빛이 감도는 옅은 파란색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린 듯한 강열한 눈빛의 소녀 말이다. 그러나 이 사진 역시 탈레반 정권하에서 아프간 여성의 비참한 삶을 웅변하기보다는 분쟁국의 아름다운 한 소녀로만 소비됐다.

여기, 이방인에게 유린당한 베트남 소녀가 있다. 소녀는 피와 유령으로 정지된 공간에 원한의 씨앗을 뿌렸다. '손에 피를 묻힌 자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영화 '알 포인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의 비극적 말로를 그렸다. 영화에서 군인들은 알 포인트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운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해한 누군가의 유령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명분없는 더러운 전쟁에 발을 들인 그들 역시 전쟁의 협력자이고 가해자다. 피해에 익숙한 우리가 가해자가 됐다는 것은 무척 낯설다. 1964년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로 파병했다. '월남 해방'과 '자유 수호'라는 화려한 명분으로 한국군은 열대의 밀림에서 양민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여인들을 집단으로 윤간했다. 베트남 마을 곳곳엔 지금도 증오비가 있다고 한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증언하기 위해서다.

벨라루스의 기자 출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남성들에 의한, 남성들의 전쟁을 여성들의 전쟁으로 이야기했다. 2차대전 당시 소련과 독일이 치른 전쟁을 겪은 소련 측 여성 200여명에 관한 얘기다. 여성이 겪고, 여성이 목격한,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준 여성들의 전쟁. 여성들도 빨치산으로 혹은 총칼 들고 전장에서 싸웠다. 하지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여성들의 숭고한 이상이나 승리, 영웅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 선 보통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줄 뿐이다. 승패에만 열을 올리던 남성들의 전쟁은 여성들이 입을 열자 쓰디 쓴 위액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여인들을 강간하고 학살하듯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한 끼 밥'으로 취급하면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공식조사나 보상도 없이 침묵하고 있다. 알 포인트의 역사적 상흔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장면과 겹친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한국도 가해자라는 사실을.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청주서 국내 최초 고고학 대박… 운천동서 고려 ‘청석탑’ 온전하게 나왔다
  2. 담양군, 전남도 예쁜정원 콘테스트 최우수상·우수상 석권
  3. 전쟁 끝났는데 홀짝제 풀리나…차량 2부제 완화 여부 관심
  4. 성남 원도심, 대규모 정비사업 본격화…도시 균형발전 시험대 오른다
  5. 충남대 통합 찬반투표 앞두고 쟁점 재점화…17일 대토론회
  1. [현장의 사람들] 불길이 남긴 흔적 쫓아 원인 밝힌다…대전동부소방서 곽맹걸·이태규·김재능 화재조사관
  2. "우주에서 본 지구, 협력이 답이었다" 우주인 이소연 박사 대전ISS서 강조
  3. 가축방역 최전선 '공중방역수의사' 처우 개선 '첫 단추' 끼웠다
  4. 충청권 의료현안 정조준 복지부 국립대병원 육성안…상경진료·치료가능 사망률 효능 주목
  5. 오석진 인수위, 17일 첫 업무보고

헤드라인 뉴스


충청권 반도체 패키징 벨트 `호남 투자론`에 제동 우려

충청권 반도체 패키징 벨트 '호남 투자론'에 제동 우려

<속보>=충청권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반도체 후공정 투자 구도에 변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지역 사회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본보 6월 11일자 1면 보도> 더구나 국가균형발전 기조 속에 정치권을 중심으로 호남권 반도체 투자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지만, 충청 정치권에선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투톱의 충청권 기존 투자 계획 이행은 물론 신규 투자 등을 위해선 지역 정치권의 전력투구가 요구된다. 17일 지역 정·관가와 업계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23년 충남 천안·온양을 첨단 패키..

대전의 아들 황인범 월드컵서 아시아 유일 베스트일레븐 선정
대전의 아들 황인범 월드컵서 아시아 유일 베스트일레븐 선정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눈부신 경기력을 뽐낸 '대전의 아들' 황인범이 월드컵 선수들 중 베스트 일레븐에 뽑히며 활약을 인정받았다. 글로벌 축구 콘텐츠 매체인 '매드 풋볼(MAD FOOTBALL)'은 월드컵 조별리그 A~H조 1차전 중간 베스트 일레븐을 선정했다. 황인범은 4-3-3 포메이션으로 선정된 베스트일레븐에서 미드필더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아시아권에선 유일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남은 미드필더 두 자리는 자말 무시알라(독일), 페드리(스페인) 등이다. 황인범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청년이 미래-2편]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대전시가 잇는 청년들의 인연
[청년이 미래-2편]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대전시가 잇는 청년들의 인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도대체 어디서 만날 기회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있어도 일상 속에서 만남의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비대면 문화와 개인화된 생활방식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접점이 감소한 데다, 학업과 취업 준비, 바쁜 직장 생활 등으로 인해 관계를 형성할 시간적 여유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또한, 온라인 중심의 만남이 늘면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만남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는데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만남'을 갈망하는 청년들을 위해 대전시가 마련..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여름철 풍수해 대비 장비 점검 여름철 풍수해 대비 장비 점검

  • 수족구 예방…‘꼼꼼하게 손 씻어요’ 수족구 예방…‘꼼꼼하게 손 씻어요’

  • 접시꽃에 담긴 여름 접시꽃에 담긴 여름

  • 임직원들이 함께 즐기는 월드컵 임직원들이 함께 즐기는 월드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