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누비진 삶 속 오롯한 꽃향기 듣기

  • 오피니언
  • 춘하추동

[춘하추동]누비진 삶 속 오롯한 꽃향기 듣기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25-03-04 17:05
  • 신문게재 2025-03-05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수년 전부터 매일 새벽 3시 35분에서 50분 사이에 답장은 안 해도 되고, 가끔 읽어주심에 감사드린다는 한 지인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적은 메일이 온다. 오늘은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아파트 정자를 뒤로하며 얕은 숲 계단을 내려간다. 아직 겨울의 쓸쓸함을 몸에 싸맨 채 허물을 벗지 못하는 내게, 정자 옆에 자리한 산수유와 작은 숲 양지쪽 개나리가 수줍은 봉우리를 내밀며 "봄이야, 봄!"이라 소리 지르는 듯하다. 이럴 땐 불현 듯 꽃으로 살고 싶어진다.

오늘 만남의 까닭을 말하자면, 며칠 전 지인의 메일 속에서 읽은 '문향하마 지미정거'(聞香下馬 知味停車, 향기를 맡은 이는 말에서 내리고, 맛을 아는 이는 수레를 멈춘다)가 그것. 찾아간 음식점엔 '聞香下馬'란 현판이 걸려있다. 아! 그렇구나 '맛 집'에서 보자는 뜻이었나. 근데, 좀 의아하다. 음식의 향기는 코로 맡는 것 아닌가? 왜 귀로 향기를 맡는다는 의미로 聞(들을 문)자를 사용했을까?

문득 삼년 전 이때쯤 조식이 그의 초막인 산천재 뜨락에 심었던 남명매를 찾아가 만나본 인연과 생각하며 피는 꽃 탐매를 표현하는 '문향하마'가 떠오른다. 영문학자(김명렬)은 산문집 『문향』에서 저자의 외숙 옛 집에서 '문향루'라는 편액을 본 기억과 사색을 더듬는다. 오늘 만난 지인은 커피 못지않게 차를 즐기는 사람이나 향을 다루는 이들은 꽃향기를 맡는 게 아니라 듣는다라고 표현하며, 우롱차를 마실 때 주로 쓰는 좁고 길게 생긴 찻잔을 '문향배'라 이름 짓고 있음도 알려준다.

이렇듯 문향이란 말의 쓰임새나 속뜻은 참 깊고 넓은가 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추억이라든가 일상사까지도 문향의 감수성과 관찰을 거치면 의미 깊은 삶의 진실이나 각별한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앞으론 계단 한 쪽에 핀 할미꽃이나 아파트 작은 화단에 피어나는 목련이나 철쭉 같은 꽃들이 놀라지 않도록 알맞은 거리에서 꽃향기를 들어 볼 일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문향의 풍경을 그려낼까? 사유의 촉을 더듬거려 보면 무엇보다도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해 배우'려는 메타(meta)시선의 결핍의 삶이 아닌가 싶다. 즉 거울에 비친 자신과 늘 접하는 주변 세계 속 사물사이의 이면을 바라보며 또 다른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 현상 너머를 성찰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의 부족함 말이다.

특히 언어세계에서 그러하다. '문향적인 태도와 초월적사고'를 지닌 이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몰라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알아도 침묵하거나, 아는 것을 가지고 '꼰대질'을 하지 않는다. 대신,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거나,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거나, 무지를 그저 맥없이 선언하기보다는 질문한다, 옳고 바른 질문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문향의 행위이며, 대상을 메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하다.

게다가 대상에 대한 감성적 문향과 복합적 시선은 앎의 한계를 예민하게 혼융(混融)시키면서 삶을 두 배로 살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일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삶의 체험을 두 배로 늘여주듯이. 영화를 즐기면서 동시에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감상의 희로애락을 몇 배로 늘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순수감각과 창의적 관점을 유지하는 일은 많은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고단한 일이다.

우리네 일상은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전쟁 같은 삶이기에 겪어내야 할 일은 무거운데 갈 길은 멀다. 그렇지만 우린 순간순간 삶의 고단한 책임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나는 언제 쯤 더 이상 거칠고 심란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 때 우리는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免)한다는 기쁨을 내려놓고 면함을 '안다'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란 삶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문향과 메타시선'의 노를 젖는 사공이 되고 볼 일이다.

다가온 새 봄 여기저기에서 꽃향기가 귓전에 들려온다. 흘러가는 시간의 가슴 속 깊은 상처도 누비진 삶도 오롯한 꽃향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문득 눈 속에서 녹아내리는 물소리의 맛도 음미할 수 있다. 감각의 순수와 생각의 예민함으로 누군가에게 꽃으로 다가 서보자.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홈플 세종점, 정상화 수순 밟나… 운영 재개 '숨고르기'
  2. KAIST와 엔비디아 AI 공동연구소 출범…한글과 국내산업 맞춤 에이전트 개발
  3. 경찰 순환인사 내년 도입 예고… 지역 우수 수사인력 유출현상 우려 목소리
  4. 먹거리 물가 안정 총력…계란·고등어 공급 늘리고 할인행사 확대
  5. 장성군, 힐링 맞춤형 여행 명소 '각광'
  1. 대전혁신센터, 지역 중견기업 노하우 스타트업 전수 '밋업데이' 성료
  2. 대전 무인점포 17차례 절도·미수… 청소년 2명 집행유예
  3. 한기대, 폭염 속 건설현장 찾아 '안전동행 간담회' 개최
  4. 천안동남소방서, 건강한 일터 조성 위해 조직문화 개선 교육 실시
  5. 충남교육청평생교육원, 직속기관장 협의회 개최

헤드라인 뉴스


먹거리 물가 안정 총력…계란·고등어 공급 늘리고 할인행사 확대

먹거리 물가 안정 총력…계란·고등어 공급 늘리고 할인행사 확대

정부가 계란과 고등어를 비롯한 주요 먹거리의 공급을 늘리고 농·축·수산물 할인행사를 확대하는 등 생활물가 안정 대책을 강화한다. 재정경제부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는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 중동 정세에 따른 물가와 공급망 대응 방안을 점검하고 먹거리 가격 안정을 위한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 정부는 이달과 다음 달 농·축·수산물을 대상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할인행사를 진행한다. 할인행사 참여 온·오프라인 유통업체도 다음 달부터 기존 75곳에서 90곳으로 확대해 소비자 부담..

홈플 세종점, 정상화 수순 밟나… 운영 재개 `숨고르기`
홈플 세종점, 정상화 수순 밟나… 운영 재개 '숨고르기'

지난 13일 임시 휴업에 들어간 홈플러스 세종점이 본사의 영업 재개 명단에 포함되면서 운영 정상화 수순을 밟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중도일보 2026년 4월 16일자 3면, 7월 10일자 5면 보도> 앞서 조치원점이 지난 4월부터 휴점에 들어간 만큼, 홈플러스 세종점의 영업 재개 여부에 세종시민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8월 초 전국 67개 마트의 재오픈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들 주요 점포가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홈플러스의 진정한 '회생' 여부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24일 세종시에 따르면 어진동 홈플..

KAIST와 엔비디아 AI 공동연구소 출범…한글과 국내산업 맞춤 에이전트 개발
KAIST와 엔비디아 AI 공동연구소 출범…한글과 국내산업 맞춤 에이전트 개발

KAIST와 엔비디아(NVIDIA)가 한국어와 국내 산업에 특화된 차세대 에이전틱 AI(Agentic AI) 연구를 위해 전략적 공동연구 체계를 구축한다. KAIST(총장 배충식)는 글로벌 AI 컴퓨팅 기업 엔비디아와 김재철AI대학원 서울캠퍼스에 'NVIDIA-KAIST AI 공동연구소(NVIDIA-KAIST Joint AI Research Lab)'를 설립하고 차세대 인공지능 핵심기술 공동연구를 본격화한다고 24일 밝혔다. 공동연구소는 대한민국의 산업과 언어 환경에 특화된 에이전틱 AI 모델과 에이전트 시스템을 개발하고, AI 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머드에서 놀자’…보령머드축제 개막 ‘머드에서 놀자’…보령머드축제 개막

  • 도심 속 공원에서 즐기는 물놀이 도심 속 공원에서 즐기는 물놀이

  • 개인형 이동장치 수거차량 ‘무법 질주’ 개인형 이동장치 수거차량 ‘무법 질주’

  • 대전 동부소방서, 온열질환 예방 총력 대전 동부소방서, 온열질환 예방 총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