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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단을 조직하고는 일본 헌병대를 습격해 사살하고 무기를 빼앗았으며, 당시 악질 직산군수를 처단하기도 했던 한훈(韓焄·1890~1950·사진) 열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충남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외삼촌에 이어 형인 한태석과 함께 홍주의병에 참여한 한 열사는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으로부터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받아 국내에 들여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 열사로 인해 국내 광복단 결사대가 무기를 갖춰 항일투쟁 기반을 갖춘 것이다. 한 열사의 근본 목적은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일제강점 3대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와 친일내각 선봉인 이완용 등을 처형하는 것을 구체적 목표로 삼았으나, 내부 변절과 일제경찰의 검열 등으로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열사가 속한 광복단은 다수의 친일부호와 친일형사, 친일관찰사나 군수, 면장 등에게 응징을 가하거나 그들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광복단은 대담한 친일파 숙청 활동 속에도 조직의 정체가 노출되지 않았으나, 회원 이종국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해 37명이 체포됐다. 나머지 회원들은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한 열사도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광복단 결사대장이었던 한 열사는 1920년 8월22일 동지 김상옥에게 무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제경찰에 붙잡혀 징역 8년형을 받았다.
한 열사는 재판에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임했다.
당시 신문은 '한훈은 이 사건의 중요 수령인만큼 답변 태도가 매우 냉담했으며, 다른 사람처럼 허둥대지 않고 피고석에 꼿꼿이 앉아 입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복역 중 의병활동을 이유로 가형돼 19년6개월을 복역하고 나온 한 열사는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 공산군에게 연행돼 학살당했다. 정부는 1968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02년 2월에는 국가보훈처 주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정은 3·1운동 기념사업회 회장은 “한훈 열사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의 주인공 김상옥 열사와도 동지이자 훗날에는 사돈이 되기도 하는 등 가장 단합이 잘 됐던 독립운동 단체의 투사였다”며 “이미 알려진 위인도 많지만,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애국열사를 발굴해 지속적으로 조명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내포=유희성·천안=김경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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