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뜨거운 피에 바치는 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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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뜨거운 피에 바치는 연서

  • 승인 2022-03-30 09:44
  • 수정 2022-03-31 08:43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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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제공
오랜 옛날(그래봤자 50년 조금 안된), 올망졸망 6남매의 '흥부네' 가족이 있었다. 이 가족에게 고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 먹을 수 있는 귀한 거였다. 겨울에 흥부 마누라는 선짓국을 종종 끓였다. 시뻘건 선지를 양철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으레 흥부네 집에 들렀다. 선지가 고기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흥부네는 할머니의 단골이었다. 하얀 머리를 비녀로 꽂고 옅은 회색 치마 저고리를 끈으로 허리를 질끈 맨 선지 할머니는 코딱지 만한 흥부네 방에서 자고 간 적도 있다. 흥부 마누라가 끓인 선짓국은 달랐다. 핏덩어리를 잘게 으깨서 고춧가루와 마늘, 파만 듬뿍 넣었다. 흥부네 가족은 그런 날, 두리반에 둘러앉아 뜨거운 선짓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훌쩍 큰 흥부네 막내딸은 대처로 나가 직장을 다니는데 어느 휴일에 피맛을 봤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유리컵을 놓쳐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다 엄지 손가락을 베인 것이다. 빨간 피가 솟아올라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흥부 딸은 엉겁결에 다친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비릿한 내음이 훅 끼쳤다. 쇠맛이랄까. 선홍색 피가 하얀 눈밭에 똑똑 떨어지면 고혹적이겠다고 생각했다. 피는 왜 빨간색일까. 언젠가 흥부 딸은 건강에 좋다고 해서 사슴피를 마셨다는 친구 얘기를 듣고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피에 굶주렸다.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자신이 죽인 상대의 피를 마셨다. 상대가 지니고 있던 힘과 용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승리의 징표였다. 경기장 안의 관중들은 검투사의 피를 가져다 팔기도 했다. '피의 백작 부인'으로 불린 동유럽의 에르줴베트 바토리는 자신의 젊음과 미모를 위해 정기적으로 사람의 피로 목욕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피의 희생양은 단서가 붙었다. 반드시 처녀여야 한다는 것. 끔찍한 고문으로 죽인 처녀들의 피로 샤워하는 백작 부인! 두렵거나 혹은 유혹적이거나. 이것이 피의 본질인가.

피를 빠는 당신, 공포와 매혹의 드라큘라. 입안 한가득 생명의 액체를 빠는 드라큘라의 갈망은 허기가 아닌 갈증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갈증 말이다.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드라큘라'는 끔찍하면서 매혹적인 흡혈귀의 이중성을 그렸다. 드라큘라(게리 올드만)는 단지 피에 굶주린 흡혈귀가 아니라 고뇌하는 실존주의자로 재탄생했다. "삶이 고통스러워." 음습한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드라큘라의 시간의 강을 뛰어넘는 불멸의 사랑에 관객의 가슴도 찢어진다. 번뇌와 갈등은 인간의 숙명 아닌가. 그런데 고뇌하는 드라큘라라니. 면도날에 묻은 피를 혀로 스르릅 빨면서 쾌감에 진저리치는 드라큘라의 그 손짓, 목소리. 이토록 우아한 흡혈귀가 있을까.



지난해 불현듯 신선한 피가 그리웠다. 몸 안의 피가 부족했던 걸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피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금요장터엔 야외에 커다란 스테인리스 솥을 몇 개 걸어놓고 탕을 파는 부부가 있다. 선짓국, 육개장, 추어탕, 내장탕 등. 거기서 먹을 순 없고 비닐 봉지에 담아서 파는, 테이크아웃인 셈이다. 어느날 수트발이 잘 받는 신사가 선짓국 4인분을 주문했다. "여기 선짓국 맛있어요?"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먹을 만 해요."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선짓국을 들고 멀어져 가는 신사를 보면서 나도 2인분을 시켰다(1인분은 안 판다). 집에 와서 냄비에 붓고 다시 끓였다. 주먹만한 선지들과 우거지, 콩나물이 된장국물과 어우러져 구수했다. 엄마가 끓여줬던 칼칼한 맛은 아니었지만 퍽퍽한 선지를 수저로 잘라 으깨 먹는 맛도 일품이었다. 지난 금요일엔 아예 냄비를 가져가 담아왔다. 뜨거운 선짓국이 비닐봉지에 담기는 것이 께름칙했었다. 뱀파이어는 오염된 피를 싫어하니까.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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