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허균의 식탐, 이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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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허균의 식탐, 이유 있었네

  • 승인 2021-10-06 10:31
  • 수정 2021-10-06 15:24
  • 신문게재 2021-10-07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우난순 수정
조선의 이단아이자 천재였던 허균도 식탐이 많았다. 그는 "나는 평생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허균은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할 때 윗사람에게 간곡히 부탁하곤 했다. 먹거리가 풍부한 곳으로 보내달라는 이유에서다. 한번은 황해도 배천이란 곳으로 발령나자 거기는 싫다며 차라리 가림(지금의 부여 임천)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가림은 생선과 게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이렇듯 맛있는 걸 무지하게 밝힌 허균은 유배지에서 조선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썼다. <도문대작>은 전국 팔도의 토산품과 음식을 소개한 책이다. '도문대작'은 푸줏간 앞에서 입을 크게 벌려 고기 씹는 흉내를 내 식탐을 달랜다는 뜻이다. 선비들은 이런 허균을 잡스럽다고 비아냥댔지만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했던 허균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허균의 고향 강릉은 초당 두부로 유명하다. '초당'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호다. 초당 두부는 허엽이 동해의 맑은 물로 간을 맞춰 만들어 먹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 두부 맛이 소문 나 마을 이름을 아예 초당이라 붙였다고 한다. '초당할머니순두부' 식당은 역사가 40년이 됐다. 국산 콩과 바닷물 간수로 매일 아침 두부를 만들어 판다. 점심으로 먹었는데 째복(비단조개)을 넣고 끓인 얼큰째복순두부를 국물 하나 안 남기고 뚝배기 바닥을 박박 긁어 먹었다. 식품회사에서 만든 순두부는 푸딩처럼 미끈덩거려 씹는 느낌이 없다. 이 집 순두부는 고소하면서 몽글몽글한 것이 톱톱한 질감이 있었다. 얼큰하고 뜨끈한 순두부를 줄줄 나오는 콧물을 훌쩍거리며 퍼먹었다.

예전엔 명절이 오면 집에서 으레 두부를 만들었다. 농사지은 콩으로 넉넉하게 만들어 윗집, 아랫집에도 나눠주곤 했다. 그런데 두부는 만드는 품이 꽤 든다. 물에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서 천으로 된 자루에 넣어 꼬옥 짠 콩물을 가마솥에 넣는다. 그걸 오랜시간 뭉근히 끓이면서 엄마는 간수 넣은 대접으로 콩물을 떠 살살살 흔들어 순두부를 만드는 것이다. 하여간 하루종일 두부 만든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나는 두부를 안 먹었다. 허연 것이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엄마는 두부를 만들까 이해가 안됐다. 이제 나이를 먹어 겨울이면 무릎이 시리네, 골다공증이 오네 하다보니 열심히 두부를 먹는다. 또 맛있기도 하고.



두부를 좋아한 부친처럼 허균도 두부를 좋아했을까.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선 허균은 전국에서 나는 별미를 먹어보는 복을 누렸다. 허나 타고난 식복과는 달리 허균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진보적인 사상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권세가들의 눈밖에 나기 일쑤였다. 허균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대부들과 엄격한 유교윤리에 염증을 느껴 서자와 천민 출신 예술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깟 놈의 세상에 침을 퉤 뱉으며 박차고 나가 율도국을 건설한 홍길동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식욕을 억제해야 한다는 성리학의 주장을 부정한 허균의 식탐은 완고한 사회통념을 조롱한 행위 아니었을까.

후식으로 순두부젤라또를 달게 먹고 바닷가 백사장으로 달려갔다. 낮게 드리운 잿빛 구름 아래서 동해의 일렁이는 파도가 으르렁거렸다. 철썩철썩 쏴아. 쉬지 않고 무섭게 달려드는 파도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허연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 같았다. 드넓은 바다를 넋 놓고 바라보며 인생사가 이런 건가 싶었다. 저 파도에 부딪쳐 앞으로 나아가거나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거나. 역동적인 파도에 몸을 실어 거친 물살과 함께 리듬을 즐기는 서핑이 멋져 보일 때도 있다. 환멸을 겪은 뒤에도 희망이 꿈틀거리다니.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허균은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며 바다 속 진미를 떠올리면서 입맛을 쩝 다시겠지?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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