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훈수

  • 오피니언
  • 오늘과내일

[오늘과내일] 훈수

김희정 시인

  • 승인 2020-05-03 09:14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김희정 시인
김희정 시인.
초등학교 2학년 여름에 동네 점방에서 장기를 처음 배웠다. 어른들이 장기를 두면 한참을 지켜보며 차가, 포가, 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었다. 장기의 매력은 두는 것보다 훈수에 있다는 것은 나중에 깨달았다. 겨우 장기가 가는 길을 익힌 나는 장기판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른들 판에 끼어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장기가 가는 길을 좀 더 선명하게 익혀갈 무렵 훈수를 두고 말았다. 내 훈수에 화가 난 어르신께 그날 혼이 났다.

4·15총선이 끝이 났다. 여당(진보)의 압승이니, 야당(보수)의 참패니 하는 말을 들으며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가 있었다. 선거에서 더불어 민주당이 압승했다는 것은 이해가 됐지만, 보수가 괴멸됐다는 정치 전문가들의 말은 와 닿지 않았다. 미래통합당이 패배를 한 것은 알겠다. 그런데 보수가 전무후무한 패배를 당했다는 말은 다수 주권자의 시선을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을 한다면 이번 선거는 보수의 압승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보수인 민주당이 이겼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이 넘는 나라 중에 진보 정당이 정권을 잡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나 더 얘기한다면 통합당을 아무리 보아도 보수당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국민은 세상을 크게 바꾸는 것이 싫다. 지금처럼 살면 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보수는 작금의 세상을 지키고 싶고 진보는 바꾸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이 넘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서 보수를 찍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것은 이웃나라 일본을 보거나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진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민주당이 다수의 의석수를 확보했다고 정치 평을 하고 있는 모습 또한 와 닿지 않았다.



보수당을 자임한 통합당은 국민소득 3만 불을 들고 있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4연속(20대 총선, 19대 대선, 제7회 지방선거, 21대 총선) 패배를 당했다. 우리나라보다 소득이 높은 나라들은 대부분 보수의 가치를 지향하는 정당이 권력을 잡고 있다. 21대 총선의 결과로만 본다면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민소득 3만 불이 넘으면 보수가 권력을 잡을 확률이 높다는 명제가 깨져야 하거나 통합당이 보수당이 아니다는 결론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혹여 보수가 아닌데 보수라고 불러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진보가 아닌데 진보라고 긁어주고 있는지 말이다. 통합당이 보수의 가치를 대변했는데 이번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면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현상을 만난 것이다. 충격에 빠질만하다. 그럼 두말할 것 없이 당의 정체성과 더불어 가치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통합당이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거나 그 이하(반동)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 말 그대로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통합당에 기생하는 잡초들을 모조리 뽑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대선을 준비할 수 있고 수권정당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런 것 없이 유튜브나 일부 언론들이 통합당은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당이라고 생각 없이 말한 것을 믿고 앞으로도 계속 밀고 간다면 진보도 아닌데 진보 소리를 듣는 당이 계속 권력을 잡을 수밖에 없다.

미래 통합당이 요즘 바쁘다. 명목은 어떻게 하면 혁신을 하느냐, 잊어버린 주권자의 마음을 찾느냐로 말이다. 그런데 훈수를 두는데 그 옛날 장기판에서 느낀 짜릿한 맛이 없다. 하나마나한 정치 훈수여서 그런 것 같다. /김희정 시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