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여름의 끝자락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여름의 끝자락

김태열 수필가

  • 승인 2023-08-28 14:13
  • 신문게재 2023-08-29 19면
  • 이유나 기자이유나 기자
김태열
김태열 수필가
구애를 위한 열정으로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사그라진 여름의 끝자락이다. 한더위의 절정을 넘기니 아침·저녁으로 한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구름 사이로 부쩍 높아진 하늘을 쳐다보면서 밖으로 뻗어 나간 마음을 거두어 다가올 성숙의 시간을 준비할 시간이다.

벌써 시선은 올해의 끝자락을 향한다. 해마다 연초에 세웠던 부푼 꿈은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세상은 숫자로 계량화하여 비교·경쟁하는 데서 비롯된 부작용으로 은둔·고립이 늘어나고, 불만·분노가 팽배한 사회로 되었다. 새삼 삶이라는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타인의 시선에서 웬만큼 자유로운 나이에 자기만의 길을 찾아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쯤 커피숍에 어김없이 3인이 나타난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한동안 끊어졌던 노자 공부 모임이다. 올 초부터 다시 이어가고 있다.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겉모습을 보면서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의 힘 앞에 새삼 무상을 느낀다. 한여름이 지나가듯 인생의 치열한 때를 넘기고 도달한 또래들이다.

각자 노자를 공부한 지도 햇수로 치면 제법 된다. 한 친구는 엑셀로 역대 노자의 주석을 정리하고 노자 색인과 자전을 만들었다. 다른 벗은 노자강의를 듣고 열람용 책을 묶었다. 또 다른 이는 노자 공부를 위한 마중물이라는 책을 준비 중이다.



공부 방법은 한가하고 느긋하다. 노자 81장 중 매주 한 장씩 원문과 해석을 읽고 발제를 하면 의문점이나 관점을 말함으로써 열린 해석의 가능성을 알아간다. 자기만의 풀이에 들어가도록 서로 길을 안내한다고나 할까. 치열한 논쟁은 없다. 제각각인 우리의 노자 접근법은 과녁 없는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초등학생처럼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운이 좋으면 한 주 동안 공부 거리가 될 의문부호 하나 챙겨 간다.

우리에게 '고도를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생의 쨍한 순간에 매듭짓지 못하고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는 인생의 숙제를 더듬는 정도다. 치열함 뒤에 맛보는 휴식 같은 시간이다. 노자의 글을 읽어 단번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을 알기에는 역사의 시층(時層)과 사유의 퇴적층이 너무 깊다. 노자는 호흡을 길게 하며 읽어야 한다. 풀어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양생·수련·처세·도덕·철학·정치 같은 여러 색깔로 나타난다.

'존재와 시간'으로 철학계에 큰 자취를 남긴 하이데거도 중국인 제자와 함께 노자를 일부 번역하였고, 제15장에 나오는 한 구절을 자기 서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지금에 이르도록 노자를 공부해보니 노자를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민 겸손 유연함 자유로움, 부나 권력처럼 개념화된 것에 빠지지 않은 지혜, 무엇보다 물처럼 다투지 않고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덕에 대해 새로이 눈뜨게 된다.

인생의 여름을 지났는데 무슨 결핍과 펼치지 못한 욕망의 날개가 있을 것인가. 젊은 날 달구던 열정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갔음을 안다. 헛헛한 마음에 스며드는 것은 소유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가려는 무위의 욕망이 아닐는지.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떠날 때 스스로 한계를 긋지 않고 알 수 없는 가능성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살다간 보람이 있을 테다.

인간은 생김새, 부모, 나라를 선택함이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이기에 근본적으로 부조리한 세상에서 산다. 그렇지만 자기만의 길을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가면 어제의 나, 오늘의 나는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내일의 새로운 나가 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늦은 나이란 없다고 한다. 스스로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통해 행복을 느끼면 진정 괜찮은 삶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가을의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어렴풋이 들린다. 장마와 무더위에 지친 일상의 리듬을 회복하기 좋은 여름의 끝자락에 서 있다. 계절의 순환을 좀 더 깊고 그윽한 시선으로 성찰하며 다가올 결실의 시간표를 점검해 보면 어떨까. 김태열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