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뛰어야 사는 인생, 마라톤

  • 오피니언
  • 프리즘

[프리즘] 뛰어야 사는 인생, 마라톤

이상훈 대전대 교수·대전자치경찰위원

  • 승인 2023-11-07 10:24
  • 신문게재 2023-11-08 19면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이상훈
대전대 교수·대전자치경찰위원
이렇다 할 변변한 운동조차 못한 채 마냥 바삐 살기만 하던 어느 날, 우연히 빗길을 무리 지어 달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마라톤이었다. 필리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렸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인간의 뜀박질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속도라면 치타나 타조처럼 인간을 능가하는 동물들이 수두룩하고 이를 대체할 자동차나 비행기가 즐비한 세상임에도 굳이 땀 흘려 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에너지를 집중하는 인간의 무언의 행위 앞에서는 모두가 엄숙해진다. 그날, 결승선을 향해 자기 몸뚱이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토너들의 몸짓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마라톤은 아마추어들에게 많게는 네 시간 이상을 일정한 속도로 달려야 하는 운동이다 보니 완주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심이 절로 들게 한다. 어느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했듯, 나도 문득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2017년 여름부터 1년간 연구차 뉴욕을 방문했을 때였다. 매디슨가에 거처를 구한 덕분에 아침이면 뉴요커들과 센트럴 파크에서 텐케이(10Km)를 뛰며 맨해튼에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59번 거리와 110번 거리 사이를 남북으로 오가며 연못과 호수 그리고 공원 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후미를 지나 5번가 건너편 구겐하임미술관의 하얀 자태를 확인할 때면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할렘미어(harlem Meer)에서 유영하는 오리 가족은 달려온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비록 뉴욕마라톤은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지만 다른 크고 작은 달리기 대회와 함께 호흡했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도시에서 '러닝크루'라는 이름의 도심 달리기가 유행하고 있다. 그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자유롭게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모인다. 이런 도심 달리기는 뉴욕, 런던, 베를린, 파리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했다. 그 해, 맨해튼 빌딩 숲을 가로질러 이스트 리버와 허드슨 강변을 이어 달리는 모임에 어깨를 나란히 한 기억이 새로웠다.



지난주, 다시 용기를 내어 마라톤에 도전했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아내와 함께 준비하는 과정도 사뭇 좋았지만 나의 인생에서 마라톤과 다시 만날 시간이라는 사실에 감동했다. 마라톤에서는 지구력이 중요한데, 그 비밀은 효율적인 냉각장치에 있다. 땀과 열을 잘 배출한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비싼 컴퓨터도 쿨링팬이 망가지면 무용지물이듯 열을 식히는 문제는 오래 달려야 살아남는 인간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지구 두 바퀴 반에 맞먹는 길이인 9만5천km에 달하는 혈관의 절반 이상이 우리의 피부에 모여 열기를 식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달려야 존재한다. 공식 마라톤 기록은 여전히 2시간대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력이 뛰어난 달리기 선수로서 장거리에서는 다른 동물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개들은 매우 빠르지만, 비교적 짧은 거리만 달릴 수 있다. 인간은 제때 충분하게 온몸으로 땀을 흘려 몸이 쉽게 과열되는 것을 피할 수 있지만, 개들은 주로 혀를 통해서만 열을 식히기 때문이다.

샐러리맨들의 급여는 10년 이상 동결인 곳이 흔하지만, 이젠 하루가 다르게 뛰는 물가가 새삼스럽지도 않다. 마라톤은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그래서인가 보다. 어쩌면 우리가 뛰는 물가보다 더 오래 지긋하게 달릴 수만 있다면 결국에는 저만치 앞서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려면 세상사에 분통 터트리는 열기도 과열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땀 흘려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은 초코파이 하나에도 힘을 얻어 좌절과 포기를 딛고 일어나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존재다. 나의 다리는 물론 나의 인생도 감동의 백만불짜리 '말아톤'이 될 수 있다. 비록 서브쓰리의 대기록은 아닐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의 삶에도 새로운 이정표를 찍을 수 있다. 인생의 마라톤 평원을 달려 승전보를 전하자. 다시 뛰자. 이상훈 대전대 교수·대전자치경찰위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