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검은 점과 흰 점 그리고 오늘의 신세계”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검은 점과 흰 점 그리고 오늘의 신세계”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승인 2023-11-20 10:16
  • 신문게재 2023-11-21 19면
  • 이유나 기자이유나 기자
조훈성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단 하루도 '위기'가 없는 날이 없다. 날마다 뉴스 포털에서 수많은 위기의 세계를 목도한다. 전쟁에 금융에, 기후 위기 등등에 나라 안팎의 문제들은 타임라인 종단 열차를 타고 시시각각 전해진다. 나는 그 열차 안에서 시린 눈으로 '사람들의 자유를 유보하는' 뉴스 알림을 넘기다가, 코트 주머니에 들어있는 철 지난 문고판 책 밑줄을 오려서 온라인 담벼락에 붙인다. "오늘날 위기란 말은 의사, 외교관, 은행가, 온갖 사회공학자가 모든 상황을 접수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유보하는 상황을 의미하게 되었다. 국가도 사람처럼 중환자 리스트에 오른다. '위기_Crisis'는 원래 그리스어로 '선택' 또는 '전환점'을 뜻했다."(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라고 포스팅을 한다.

횡성까지 가서 지역의 '아기장수'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연극 한 편을 보고 온다.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늘 그렇듯 민중영웅 설화의 종국은 비극이다. 겨드랑이의 날개를 지질 수밖에 없는 그 설화의 세계, 그 연극이 좋든 아니든, 운명의 가련한 주인공을 저 물밑에서 끌어올려 본다. 누가 그이를 주저앉혔는가. "그게 공동체의 안녕이랍시고..." 연극이 못내 찜찜하다. 그날따라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앞차 꽁무니의 뻘건 브레이크등이 유난스럽다. 그 껌뻑대는 브레이크등을 오브제로 '영웅 없는 공동체'를 무대에 만들고, 그 극적이지 않은 극적인 것을 만드는 환상을 좇는다. 연극의 과제는 어쩌면 그 수 없는 '위기'의 정체를 밝히고. 그 '위기'에서 '선택'의 기로에 있는 우리의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대전예술의전당에서 <멋진 신세계>(A.L.헉슬리 원작, 고선웅 연출)를 보고 나온다. 왜 지금 우리는 1930년대에 상상했던 2540년의 미래를 만나야 하는지, 근 백 년 후, 2023년에 상상한 신세계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나는 구석구석 무대를 살펴본다. 우리가 그토록 세계를 탐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무대 위에 펼쳐진 상상의 신세계는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다. 극 중 '무스타파 몬드'총통이 "사실상 당신을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라고 말하자,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라고 야만인 '존'이 대답한다. 그 '안락하지 않은 삶'의 선택,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의 질문에서의 '멋진 신세계'의 만남이라고 여기게 된다. 저 무대 위의 똑똑한 바보들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변두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나는 비로소 드라마에서의 실존을 확인하며, '존재'를 찾았다고, '의미'가 만들어졌다면서 자판을 누른다.

스무 살 때였던가, 창작 수업을 듣는데 강단의 선생님이 뜬금없이 백지를 꺼내서, '검은 점'을 찍고 무엇이 보이는지 우리게 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검은 점'이 보인다고 대답을 했더니, '문학의 정신'을 들먹이며, '검은 점'의 세계에 현혹되지 말고, 이 백지의 수많은 흰점이 모여 있는 세계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설교를 한참 들었더랬다. 그런데 오늘의 연극을 보면서 나는 그 연극이 바라는 신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이제야 수많은 흰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의 비극을 눈치챈다. 우리가 그 '검은 점'들이 만들어낸 위기에서 스스로 쓸모를 잊고 살고 있다는 것을. 저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위기'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전환점'을 만들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저이들에게 맡겨놓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연극의 수많은 장면을 거듭 보면서도 내가 극장에 다니는 것이 이야깃거리를 위해 지상과 지하의 계단을 수없이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극단 홍시의 <이별의 말도 없이> 대본을 다시 꺼내 읽다가 '역전할매'의 대사 한 구절을 옮긴다. "세월이 가는 거간듀? 쌓이는 거지. 여기 이 머리에, 여기 이 가심에... 나 보다 앞서 가는 것이 있으믄, 잘 가라고 하면 되고, 그놈하고 같이 가고 싶으믄, 질뚝거리믄서라도 죽어라고 쫓아가믄 되는 거고..."라고. 어쩌면 '흰 점'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닌지, 그 목소리가 극장에 남아있어야 내일의 연극도 또 안녕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무대를 넘겨보고 또 넘어보고. 그 이야깃거리를 위해 나는 극장을 향해 또 걷는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