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해가 되었다. 여행 한다함은 사생한다는 의미였다. 사생이 뭐 그리 중요한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른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벗 삼아 즐기고 자연을 그리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자기 확장 행위이며,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평론 쓸 때 작가의 언행은 주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본인 스스로 밝힌 것이리라. "야송은 피상적인 관념성을 떠나 사실적인 진실만을 그린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알 수 없는 원근법을 쓰지 않으며, 기백이 없는 산을 그리지 않으며, 원류(源流)가 없는 물을 그리지 않으며, 출입이 없는 길을 그리지 않으며, 가지가 없는 나무는 그리지 않는다." 미술평론가 박명인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지극히 하면 새로운 기법도 터득되고 만들어진다. 정선(鄭?)의 단선점준(短線點?)법은 우리 산수를 그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야송 화백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다 학생들 앞에서 붓을 들 때면, 굉장한 속필을 보여주었다. 기암적벽을 그릴라 치면, 층층이 사각형 모양을 빠르게 그려 내렸다. 벽돌 쌓기와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먹의 농담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변화무쌍한 기암괴석이 된다. 기본적인 준법에서 보지 못하던 기법이었다. 벽돌준법이라 부르면 어떨까? 성장지였던 청송 주왕산이나 봉화 청량산 일대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스스로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다. 수묵화 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접하는 책이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다. 중국 청나라 초, 화가 왕개(王槪)·왕시(王蓍)·왕얼(王蘖) 3형제가 편찬한 화보(畵譜)이다. 필자는 1 ~ 5권을 함께 엮은 한글 번역본을 보고 익혔으나, 그림은 목판 그대로 복제된 것이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야송 화백은 수업시간에 종종, 청송 주왕산에 가면,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모든 형상이 다 있다고 주장했다. 버킷리스트로 남아있던 것을 중년 이후 수차례 찾았다. 규모나 다양성, 아름다운 경관이 경이로웠다.
작가의 독창적인 화법은 전적으로 작가관에 기인한다. 속필도 작가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산수화는 그린다 하고, 사군자는 '친다'고 한다. 그리는 것은 기교, 친다는 것은 정신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야송은 산수화도 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공부하며, 스승의 화법을 닮아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도약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때부터 모방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시련이 시작된다. 우리 미술의 전통을 살리는 법고창신(法古創新)에 노력함은 물론, 현대 수채화나 소묘 기법도 활용한다. 물론, 그가 자란 자연환경도 한 몫 했으리라.
야송의 남다른 스케일도 성장기에 함께했던 자연 경관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1979년으로 기억된다. 제3회 개인전 <야송연대산수화전>을 열었다. 필자는 늦은 군 입대로 전시장을 찾진 못했으나 준비과정은 바람결에 들었다. 응모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았던 듯하다. 당시 국전이 열리면, 덕수궁에 있던 '현대미술관'에 입상작이 전시 되었다. 수상작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해달라는 듯, 국전 기간에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현대미술관 주변 6개 화랑에서 동시에 개최한 전시회다. 화집만도 당시로선 여타 작가가 상상하기 어려운 억대 양장본으로 제작한다 들었다. 관전에 대한 외로운 도전이기도 하지만, 그대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유독 대작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 미터는 얼굴도 못 내민다. 서울 정도 600주년(1994년) 기념으로 제작한 <청량대운도>는 대략 가로 46m 세로 6.7m이다. 상상 불허의 크기는 물론이고 전시할 장소가 없어 20년 넘게 수장고에 있었다. 그림 규모의 통으로 된 건물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2013년에야 고향 청송군에 <청량대운도>만을 전시할 공간이 만들어졌다. 학교 건물이라 가능했다. 경북 청송 신촌에 있던 신촌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청량대운도>전용 전시관과 야송 화백의 소장품이었던 한국화와 도예 350점, 국내외 유명 화가와 조각가 작품 50여 점, 미술관련 서적 1만여 점을 보관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재탄생되었다. <청송야송미술관>으로 2005년 4월 29일 개관하였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