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소쇄원 가는 길

  • 오피니언
  • 오늘과내일

[오늘과내일] 소쇄원 가는 길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 승인 2024-09-29 16:34
  • 신문게재 2024-09-30 19면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lll
백낙천 교수
연산군 축출 이후 중앙 정치에 재진입한 개혁 성향의 신진 사림파들은 기존 세력인 훈구파의 견제를 받았지만 중종은 조광조를 주축으로 한 사림파를 중용하여 파격적인 개혁 조치를 취해 나갔다. 그러나 훈구파의 집요한 권력욕과 중종의 정치적 패착으로 사림파는 결국 치명적 위기를 맞게 되고, 급기야 훈구파의 최대 정적이었던 조광조는 극형을 당하는 등 역풍을 맞으면서 사림파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 사건이 1519년 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이다. 그러고 보면 정권 창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논공행상의 갈등과 신구의 정치적 대결 양상에서 발생하는 권력 투쟁의 후유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는 대쪽 같이 꼿꼿했고 타협을 모르는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불운아 조광조의 제자 중에 양산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화순으로 유배 가서 끝내 사약을 받아 죽자 양산보는 고향 근처 무등산 아래에 소쇄원이라는 정원을 짓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면서 스스로를 소쇄옹이라 불렀다.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지곡리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세워진 정원이다.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지닌 소쇄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 중에 하나로 손꼽히며, 수많은 문인들이 소쇄원을 찾아와 시문을 익혔다. 이 시기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고봉 기대승 등이 은둔자 양산보를 찾아와 교분을 나누었다. 안타깝게도 임진왜란으로 소쇄원이 소실되어 초기의 모습을 잃은 것은 뼈아픈 문화적 손실이지만 이후 역사적 자료와 고증을 거쳐 상당 부분이 복구되어 오늘날 한국의 3대 정원에 이르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10여 년 전에 수차례 학과 문학답사로 학생들을 인솔하여 조선시대 문향이 배어 있는 소쇄원 일대에 머문 적이 있었다. 소쇄원을 들어가는 길은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 적요함과 신비함을 더해 주었으며, 이 길을 지나면 청량한 바람을 맞으면서 시인 묵객을 맞이한 광풍각에 이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 아래에서 고고히 서책을 넘기며 수양을 닦았던 제월당을 둘러보면서 이윽고 소쇄원의 깊고 그윽한 정취에 취하였다. 때로, 소쇄원 근처에 조성된 울창한 대숲인 죽녹원에서 때마침 댓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휴대폰을 잠시 꺼놓고 고요한 침묵의 여유를 갖는 것은 행운 같은 덤이었다. 그리고 잠시 길을 돌려 면앙정으로도 가기도 했는데, 이곳은 송순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담양으로 내려와 제월봉 아래에 지은 정자로 송순은 면앙정에서 강호제현과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가히 담양은 조선시대 국문 문학이 꽃피었던 곳으로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가 귀양지 담양의 빼어난 경치를 표현한 <낙지가>, 송순이 무등과 제월봉의 수려한 장관을 노래한 <면앙정가>, 정철이 잠시 내려와 담양의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풍류를 읊은 <성산별곡> 등이 창작된 가사문학의 산실로서의 위상을 지닌 유서 깊은 고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문과 학생들을 인솔하여 한국가사문학관에 들러 가사 문학 작품을 감상하고 자료를 살펴보면서 소쇄원의 여정을 마무리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지난 달 소쇄원을 그리며 다시 담양을 찾았다. 광풍각 뒷마당에 서 있는 매화나무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제월당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서체답게 웅장하고 호방하며, 흙과 돌을 섞어 쌓아 올린 담장은 아담하며, 봉황이 내려와 둥지를 튼다는 담장 옆 벽오동 나무도 곧게 뻗어 있으며, 배롱나무 가지의 만개한 분홍 꽃과 자연의 계곡물을 끌어와 만든 작은 연못도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변함없다. 시대와의 불화로 뜻을 펼치지 못한 양산보, 그래서 세상의 공명을 버리고 스스로를 유폐시켰지만 그가 지은 소쇄원은 지금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소쇄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여전히 우리네 삶의 찌든 몸과 어지러운 마음을 정화시켜 주고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성추행 유죄받은 송활섭 대전시의원 제명 촉구에 의회 "판단 후 결정"
  2. "시설 아동에 안전하고 쾌적한 체육시설 제공"
  3. 김민숙, 뇌병변장애인 맞춤 지원정책 모색… "정책 실현 적극 뒷받침"
  4. 천안 A대기업서 질소가스 누출로 3명 부상
  5. 회덕농협-NH누리봉사단, 포도농가 일손 돕기 나서
  1. 천안김안과 천안역본점, 운동선수 등을 위한 '새빛' 선사
  2.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3. ‘몸짱을 위해’
  4. 세종시 싱싱장터 납품업체 위생 상태 '양호'
  5. 내년 최저임금 1만320원 지역 노사 엇갈린 반응… 노동계 "실망·우려" vs 경영계 "절충·수용"

헤드라인 뉴스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가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추진하면서 국론분열을 자초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집권 초 미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위협 등 매크로 경제 불확실성 속 민생과 경제 회생을 위해 국민 통합이 중차대한 시기임에도 되려 갈등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론화 절차 없이 해수부 탈(脫) 세종만 서두를 뿐 특별법 또는 개헌 등 행정수도 완성 구체적 로드맵 발표는 없어 충청 지역민의 박탈감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부는 10일 이전 청사로 부산시 동구 소재 IM빌딩과 협성타워 두 곳을 임차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건물 모두..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2012년 세종시 출범 전·후 '행정구역은 세종시, 소유권은 충남도'에 있는 애매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7월 폐원한 금강수목원. 그동안 중앙정부와 세종시, 충남도 모두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사실상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한 탓이다. 국·시비 매칭 방식으로 중부권 최대 산림자원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 수 있었으나 그 기회를 모두 놓쳤다.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인접한 입지의 금남면인 만큼, 금강수목원 주변을 신도시로 편입해 '행복도시 특별회계'로 새로운 미래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다. 무소속 김종민 국회의원(산자중기위, 세종 갑)은 7..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전국 부동산신탁사 부실 문제가 시한폭탄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토지신탁 계약 체결을 조건으로 뒷돈을 받은 부동산신탁회사 법인의 임직원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대전지검 형사4부는 모 부동산신탁 대전지점 차장 A(38)씨와 대전지점장 B(44)씨 그리고 대전지점 과장 C(34)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수재등)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11일 밝혔다. 또 시행사 대표 D(60)씨를 특경법위반(증재등)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A씨 등 부동산 신탁사 대전지점 차장으로 지내던 2020년 11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시행..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몸짱을 위해’ ‘몸짱을 위해’

  •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 ‘시원하게 장 보세요’ ‘시원하게 장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