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답할 수 없는 순간들

  • 오피니언
  • 춘하추동

[춘하추동]답할 수 없는 순간들

김화준 원장/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 승인 2024-10-01 15:00
  • 신문게재 2024-10-02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김화준 원장
김화준 원장
필자가 근무하는 동네의원, 즉 일차의료기관은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접근성이 가장 좋은 의료기관이다. 감기에 걸려서 콧물이 좀 나거나, 어제 음식을 잘못 먹어 배탈이 나거나, 염색하다 두드러기가 나거나,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지거나, 두통으로 어젯밤 잠을 설친 경우 등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환자들이 우선 찾는 곳이다. 이러다 보니 정말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를 가진 환자들이 많고, 때로는 어떠한 의학적인 수단과 방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의사로서 답할 수 없는 순간들이 참 많다.

# 에피소드 1, 일용직, 항염제

대개 환자분이 들어오기 전에 전자 차트를 훑어보고, 검사결과, 영상자료 등을 간단하게 리뷰한다. 26세 남자 환자였는데 거의 6개월째 매일 항염제를 두 알씩 복용하고 있었다. 사실 항염제는 위장벽을 손상하고, 장기간 복용할 경우 신장 기능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그래서 왜 이렇게 장기간 복용하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6개월 전에 허리디스크가 터졌는데, 수술할 정도는 아니래요. 일용직을 하는데 약을 먹지 않으면 통증이 심해서 매일 오전에 한 개, 오후에 한 개 복용해요." "결국 쉬지 않으면 허리 통증이 좋아지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일하지 않으며 생계유지가 안 돼서 어쩔 수 없어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마우스를 클릭하여 처방전을 발급하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그 청년의 등을 한참 쳐다보았다.



#에피소드 2: 상실, 수면제

최근 3개월 전부터 졸피뎀이라는 수면제를 복용하는 82세 어른신이 오늘도 정확하게 28일 만에 방문하셨다. 졸피뎀은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중독성과 부작용으로 인해서 28일 이상 처방이 되지 않는다. 만약 처방하려고 하면 컴퓨터 화면에 사용불가라는 경고가 깜빡거린다. 28일 맞추어서 오셨다는 건 매일 꼬박꼬박 약을 드셨다는 이야기다.

"약 안 드시면 잠을 못 주무시죠? 사실 이거 계속 장기 복용하시면 안 좋은데…."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내가 3개월 전 남편 먼저 보내고, 잠이 안 와. 이거 없으면 밤을 꼬박 새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 까만 마우스를 클릭하여 처방전을 발급하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을 한참 쳐다보았다.

#에피소드 3, 스테로이드 연고, 습진

필자가 일하고 있는 병원이 전문피부과는 아니지만 간단한 경우 처방을 하고, 치료 효과가 없으면 전문피부과에 의뢰하곤 한다. 1년 넘게 한 가지 연고만 처방 받는 분에게 질문을 드렸다.

"환자분, 이러시지 말고, 피부과 전문의 선생님 한 번 찾아가세요." "이미 갔어요. 갔더니 손에 물이 닿지 않아야 한대요. 그런데 제가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데 그게 가능해요? 혼자 애 키우는데 일을 안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연고 바르면 좀 나아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닳아서 반들거리는 까만 마우스를 클릭하여 처방전을 발급하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중년 여성의 움츠린 어깨를 한참 쳐다보았다.

동네의원에는 아프고, 약주고, 치료하는 그 이상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대화를 더 이상 이어 나가기 힘든 순간들도 있다. 의사에겐, 특히 동네의원 의사에겐, 질병을 진단하고, 검사하고 치료하는 능력 이외에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대신해 줄 수 없고, 특별한 해결책을 줄 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동네의원에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답할 수 없는 순간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김화준 원장/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가원학교 건물 흔들림 현상에 학생·교사 대피…경찰 조사 중
  2. [기고] 충청도 정신의 영원한 정치지도자 JP!
  3. [종합] 과밀 특수학교 가원학교, 건물 흔들림으로 학생 대피 후 귀가
  4. 항우연·천문연 경남 사천 이전? 연구자들 "말도 안 되는 소리"
  5. 장마철 앞두고 적십자사 구호물품 준비…‘유비무환’
  1. [사설] '해수부 결의안' 채택 못한 세종시의회
  2. [사설] 대전영화대전, 지역 영화 생태계 마중물 되나
  3. 수능 전 마지막 모의평가 9월 3일 시행… N수생도 응시 가능
  4. 대전문화재단 ‘AI&문화예술’ 포럼 개최… “AI, 예술 창작의 미래를 열다”
  5. [2025 대전교육청 학력신장] 배움이 살아나는 교실, 성장하는 서부교육

헤드라인 뉴스


李정부 집권초 격랑빠진 충청… 흔들리는 행정·과학수도

李정부 집권초 격랑빠진 충청… 흔들리는 행정·과학수도

이재명 정부 집권 초기 충청권 미래성장 동력인 세종 행정수도와 대전 과학수도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정부 차원의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추진에 더해 대덕연구개발특구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천문연구원을 경남 사천으로 빼내 가려는 PK 정치권 일각의 움직임까지 표면화되면서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셈법이 깔린 격랑에 충청권이 휩싸이는 모양새인데 지역 핵심 자원을 지키기 위한 총력 대응이 시급하다. 국민의힘 서천호(경남 남해·사천·하동) 의원은 17일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항우연과 천문연을 경남 사천으로 이전하도록 하는 '우주항공청..

코스피 3000선 코앞인데…숨 고르는 지역 상장사
코스피 3000선 코앞인데…숨 고르는 지역 상장사

3년 5개월 만에 2900선을 돌파한 코스피 지수가 3000선 문턱에서 일주일 째 숨을 고르고 있다.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악재도 있지만, 외국인과 기관의 자본이 국내 시장에 지속 유입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 신호로 보인다. 코스닥 시장에 많이 분포한 지역 상장사들의 주가도 현재는 단기 급등에 따른 피로감을 일부 해소하는 분위기다. 18일 코스피 지수 종가는 전 거래일 대비 0.74%포인트 오른 2970.40으로 집계됐다. 오전 거래 시간 2980선까지 오르며 기대를 모았지만, 3000선 돌파는 다음으로 미뤘다. 새 정부 출범에..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39. 대전 서구 관저동 일대 치킨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39. 대전 서구 관저동 일대 치킨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6·25 전사자 발굴유해 합동안장식…‘영면 하소서’ 6·25 전사자 발굴유해 합동안장식…‘영면 하소서’

  • 전기차 화재 대응 ‘하부 관통형 소화장비’ 시연 전기차 화재 대응 ‘하부 관통형 소화장비’ 시연

  • 장마철 앞두고 적십자사 구호물품 준비…‘유비무환’ 장마철 앞두고 적십자사 구호물품 준비…‘유비무환’

  • 여름철 해충 퇴치 여름철 해충 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