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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한 대전대 교수 |
인간이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특히 머지않은 미래에 목표가 있게 되면 이를 알기 위해 더욱 조바심을 치게 된다. 알고자 하는 초조감, 그것이 인간을 주술로 인도한다. 주술은 맞건 틀리건 미래를 말해주고 목표 달성을 위한 비방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주술은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발전시킨다. 특히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민중들이 억압받을 때 더 강한 성장의 필연성을 요구받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조 교체기에 특히 그러했다.
이 전환기에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자천 타천으로 많은 영웅이 등장한다. 시대를 이끌어갈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민중들을 현혹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의해 선택받은 존재라는 것이 사실 여부를 떠나 유포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등장이 정당성을 보증받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스스로를 고상하게 세탁해야 했다. 그러한 변신이 가장 극심하게 일어났던 때는 아마도 신라 말기가 아닌가 한다. 미륵(彌勒)이나 도선(道詵)의 사상 등이 이때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륵 사상은 본디 불교에서 온 것이다. 미륵은 도솔천(兜率天)에 산다고 알려져 있거니와 그가 여기서 나와 지상에 올 때, 민중들은 비로소 질곡이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믿었다. 미륵은 민중들의 꿈과 희망이었던 셈이다. 역사상 이 미륵 사상을 가장 먼저 선포한 사람은 백제의 무왕이다. 그는 선화공주와 더불어 익산의 미륵산 자락에 미륵사라는 절을 지어 천년 왕국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이 궁예이다. 그는 자신을 미륵이라고 자처하면서 혼란한 시대를 이끌어갈 적임자라고 설파하고 다녔다.
그런데 이때 이 미륵 사상을 넘어선 것은 다름 아닌 도선의 풍수 사상, 곧 주술이었다. 도선은 고려 태조 왕건의 등장을 예언했다고 알려져 왔거니와 실제로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도선 사상은 그 시대의 절대 선이 되었고,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도선비기(道詵秘記)'는 모두가 배워야 할 교과서가 되었다. 하지만 도선 사상은 고려 말 다시 미륵 사상에 중심 자리를 내주게 된다. 사회가 혼란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미륵사상이 다시 부상했거니와 논산의 돌미륵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조선 시대에는 민중들을 미혹하는 이런 사상들이 일시적이나마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직관과 모호한 감성에 바탕을 둔 인식 체계들이 정도전의 '불씨잡변'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유교적 입장에서 이 사유 체계를 비판한 것이기에 약간의 독단과 편견이 있긴 했지만, 사물의 본성을 인과관계에서 보고자 한 것은 어느 정도 과학성을 담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술에 대한 일련의 사고 체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감록'을 비롯한 이지함의 '토정비결', 남사고의 '격암유록' 등이 이때에도 계속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는 알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이 궁금해서 안달들인가. 과거의 주술들은 민중들의 억울함 등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했기에 그나마 정합성이 있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떠한가. 오직 자신의 출세와 영달만을 위해 주술을 끌어들인다. 그러한 까닭에 거의 비방이나 비책((秘策)에 가까운 수법들이 동원된다. 일찍이 만해 한용운은 '알 수 없어요'라는 시에서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라고 물은 바 있다. 답은 '알 수 없어요'다. "오늘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내일의 결과는 달라지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미래란 결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송기한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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