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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숙 대전고용센터 팀장 |
군인들의 폭동, 그 근저에는 '임금체불'이라는 생존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를 넘긴 임금체불'이 이후 사회·정치·외교 전반에 걸쳐 조선 사회를 뒤흔든 역사적 대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임오군란에 앞서서도, 1863년(철종14년)의 금위영 군병 소요와 1877년 훈련도감 군병 소요 등 봉급 미지급으로 인한 사건들이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었다.
14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자. 2025년 5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임금체불 규모는 9482억원에 달했고, 피해 근로자 수는 11만 7235명에 이른다. 이 추세라면 연말까지 체불액이 사상 최대치를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 일을 하고도 제때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이들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것은 구조적이고 반복되는 사회 문제임을 보여준다.
특히 임금체불은 규모가 작은 사업장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전체 임금체불의 71%가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고, 피해 근로자의 65% 이상이 5~29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한 근로자였다. 5인 미만 사업장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소규모 사업장에서 경영난을 이유로 임금을 가장 먼저 미루는 일이 관행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이러한 체불의 원인이 단순한 경영난 보다는 상당수 사업주의 인식과 대응 방식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임금을 법적 의무가 아닌 '지급 유예가 가능한 항목'으로 여기는 태도가 체불을 반복적으로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과 제도가 있어도 체불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는 임금 채권을 파산 시 우선변제 대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임금 체불 시 정부가 먼저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대지급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대지급금 이후 회수율은 2023년 기준으로 30%대에 머물고 있다. 사업주가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거나, 회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한국 특유의 기업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미덕으로 삼던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는 직장을 또 하나의 가정으로 여기게 했고 여기에 수직적 상하관계까지 더해져 사업주는 가부장의 권위를 획득했다. 직원도 가족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임금체불은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 경영난이라는 상황을 참작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사정쯤으로 치부되고 사업주에게 곧장 법적 책임을 묻는 것도 한국인의 정서로는 낯선 것이었다.
지금 당장 이번 달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이 학원비, 부모님 병원비, 통신비, 월세, 식비까지 생각만 해도 막막해진다. 한 달, 두 달 임금이 밀리는 순간, 단지 근로 대가가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 전체의 생활이 불안으로 뒤덮인다. "한 사람의 임금은 한 가정의 삶이다"라는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 전체의 생존을 뒤흔드는 절박한 현실이다.
이제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사업주의 임금 지급은 선택이 아니라 법적 의무이며, 사회적 약속이다. 임금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때 지급해야 하는 책임이다. 우리는 임금체불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한 가정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안으로 인식해야 한다.
임오군란은 오래전 일이지만 임금체불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로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건이다. 일한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대가를 제때 지급하지 않으면 민심이 무너지고, 공동체가 흔들린다. 임금은 사회의 근간이자 한 가정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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