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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구 (사)대전시컨택센터협회장 |
더위는 자연이 주는 일종의 시험 같다. 불쾌지수가 오르면 짜증은 가벼워지고, 인내는 쉽게 끓는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똑같은 말 한마디가 여름엔 유난히 더 뜨겁게 들린다. 우리가 무더위 속에서 버티며 배우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냉정함이다. 몸이 뜨거울수록 마음은 차가워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서일까, 여름엔 유독 명상과 산책, 독서 같은 고요한 활동이 권장된다. 내면을 단련하는 계절, 그것이 여름이다.
그러나 피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여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서(避暑)'라는 지혜를 만들어냈다. 예전에는 산이나 계곡, 바닷가로 몸을 옮기는 단순한 이동이 피서의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의 피서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공간은 다양해졌고 방식은 진화했다. 도심 속 북카페에서 보내는 조용한 오후 실내 수영장이나 영화관 또는 AI가 추천하는 최적의 냉방 시간에 맞춰 집을 비우는 스마트한 피서법까지. 피서란, 결국 더위를 슬기롭게 피하는 삶의 방식인 것 같다.
피서는 단지 온도를 낮추는 활동이 아니다. 피서는 몸을 식히는 동시에 마음을 식히는 것이다. 잠시 떠나는 것, 잠시 쉬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멈춤일 수 있다. 일 중독 사회에서 피서란 자기에게 주는 작은 자유 선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아니 한나절이라도 자신을 피서지로 초대해 보면 어떨까? 여름에 지친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삼계탕이나 냉장고가 아니라 여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편, 피서의 방식은 계층 간 차이를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누구는 해외 휴양지에서 여름을 보내고 누군가는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채 콘크리트 옥탑방에서 여름을 견딘다. 폭염은 평등하지만 피서는 불평등한 것 같다. 에너지 복지와 환경 정의가 필요한 이유다. 더위는 기후 문제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임을 깨닫게 한다.
이럴 때일수록 공동체적 의식이 필요하겠다. 지역 주민센터의 무더위 쉼터, 공공 도서관, 지하철역의 그늘 같은 공공의 피서라는 인프라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더위는 함께 나눌 때만 견딜 수 있다. 피서란 혼자 즐기는 사치가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생존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지구의 평균 온도는 오르고 있고, 더위는 점점 길어지고, 그 양상 또한 점점 극단화되고 있다. 이젠 피서가 단순한 계절적 대응이 아니라 기후 위기에 맞서는 생존 전략이 되어야 한다. 지구와 나, 개인과 사회, 국가가 함께 더위를 이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러나 그 여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무덥고 힘든 계절이지만 여름은 우리에게 쉼과 회복 그리고 성찰을 권유한다. 더위를 참기보다 더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여름은 시련이자 선물이다. 그러니 올여름 당신만의 피서법으로 자신을 잘 돌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당신과 지구에 대한 예의이자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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