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화가에게는 그의 예술혼을 불태우게 한 영원한 뮤즈이자 반려자가 있었다. 바로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여사이다. 그녀는 이중섭이 직접 지어준 한국 이름 '이남덕(李南德)'으로도 알려져 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만난 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36년 일본 도쿄의 문화학원 미술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학 중이던 이중섭은 동문인 마사코를 만나 사랑을 키웠고, 1945년 5월 해방 직후 고향인 원산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며 부부가 되었다. 짧지만 행복했던 신혼 시절, 이남덕 여사는 남편을 따라 한국에 정착해 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평온한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은 남한으로 피난했고, 전쟁과 생활고 속에 1952년 이남덕 여사는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양국의 외교 관계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통해서야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자유로운 왕래가 어려웠고, 특히 개인적인 방문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은 1953년 부산항에서 부두 노동을 하며 어렵게 번 돈으로 선원증을 마련해 단 한 차례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했다. 국교가 없던 시절, 그가 일본을 찾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선원증으로는 오래 머물 수 없어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짧은 만남은 그의 가족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간절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이후 그는 부산, 통영, 대구, 서울 등을 떠돌며 극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은지화'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 소, 닭, 어린이 등 따뜻한 향토적이고 동화적인 요소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자전적 감성이 깊이 배어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결국 이중섭은 거식증과 정신적 증세에 시달리며 1956년 9월 6일, 간염으로 홀로 생을 마감했다. 불과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의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남아 있었다는 일화는 그의 비극적인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중섭과 이남덕 여사는 한국에서 약 7년간의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남덕 여사는 남편 사후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를 그리워하며 살아갔다. 국교가 없던 시절, 서로를 만나기 어려웠던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며 살아갔다.
2022년 8월, 100세가 넘는 나이로 별세한 그녀는 생전에도 남편 이중섭의 예술혼과 삶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헌신하며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작품을 보존하고, 한국 미술계와 연구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하며, 남편의 예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힘썼다.
이중섭과 이남덕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을 넘어,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가족애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프지만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아사오까 리에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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