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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 북-칼럼리스트 |
되짚어 보니 지난여름 시간의 체를 거쳐 걸러진 일상의 어긋난 상처의 흔적들이 은미(隱微)한 가을바람을 타고 수묵화 되어 불어온다. 흘러가 버린 일상의 그림 속엔 마음먹은 목표를 이루어내려다 미끄러져 찢긴 희망의 잔해들, 내일의 번개를 기다리며 오늘이란 먹구름 속에서 어지럽게 겪어낸 일들, 기성에 안주하기보다 미완을 향해 손을 내미는 역할 기대에 맞장구쳐야 하는 일 등, 일상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어제의 '어긋남의 사건'들이 비 온 뒤 보도 위에 달라붙은 낙엽 되어 '지금, 여기'의 삶을 씁쓸하게 덮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은 이미 그 자체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에 늘 '어긋남'의 기미가 부석거린다.
그렇다면, 파도처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일상 세계를 구성하는 '비틀림과 어긋남'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 삶은 복합적이고 관계적이기에 매사가 어긋난다. 어긋남은 일상에서 생기는 우발적인 불운한 사건이나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그 속에서 일어난 '자리다툼'의 구조에 연루된 인간들의 '잇속(利) 찾기'가 불러일으킨 피할 수 없는 그 어긋남을 가리킨다. 하여 어긋난 일상의 길을 걸어보라. 우린 사회라는 유리컵, 현실이라는 뚜껑 속에서 익숙해진 만큼만 틀에 맞게 살아간다. 게다가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단 부조리에 적응하게 되고, 차별에도 익숙해지며, 단단하게 굳어져 가는 체계에 침묵하는 '어긋난 세상의 일상인'이 되어 간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계와의 불화에서 생긴 틈(어긋남)에 치유의 윤활유를 바르고 새로운 일상의 길을 뚫어 보자. 이를 위한 실천 행위는 기존의 틀을 깨고,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열기 위한 '틈'을 만들어 보는 일이다. 틈이란 단순한 어긋남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와 삶의 틀 속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일이다. 그것은 멈추어 있던 사고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다층적인 세계를 감싸안으며 새롭게 생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 공간은 우리가 마음먹고 행하려 했던 것의 머리말이고, 피할 수 없음에도 찾아야 하는 아름다운 질문이며, 우리가 늘 함께하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더불어 꿈꾸는 지향점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끝없이 "고착된 적합성" 속에 갇혀 엇갈리고 비틀린 상태에 있다. 그럼에도, 우린 일상의 심연이 품고 있는 '어긋남의 미로 속에서 가능성을 다시 열기(틈 찾기)'란 새로운 선택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건 어떤 틀에 안주하지 않고, 매 순간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노력, 틈 만들기다. 여기에서 틈은 우리가 매일 던져야 할 질문을 불러온다. "오늘 나는 어제와 무엇이 다를 수 있는가?" 이 물음 속에 사고하는 삶의 균열(어긋남)이 시작되고, 균열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틈)이 자라난다. 어긋남 속의 창조와 사유의 틈이란 자유는, 그 어긋남 속의 틈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상상하는 힘으로 부터 나온다.
또다시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우리네 일상은 '어긋남 없는 틈'이 죽어야(虛) '틈이 있는 어긋남'이 살아난다(生). 주름지고 상처 난 일상에서 좋은 삶을 위한 틈 만들기를 화두 삼아 이런저런 생각을 공글리며 걷고 있는데 가을이 성실하게 늙어가고 있다. 김충일 북-칼럽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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