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조망 그르친 건 시야의 협소함
실루엣만 더듬는 ‘주변인’ 노릇 그만
좌고우면 말고 남은 현안 꼭 챙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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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으로 보이는 풍경은 강렬하다. 커튼 사이, 얼핏 비치는 란제리 모델은 호기심을 부풀린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보인 것도(서향, 씨크릿), 살짝 열려진 틈새로 그녀 모습을 본 것도(강애진, 기억에 묻다), 루소가 바질 부인을 보는 장면(루소, 고백록) 역시 문틈을 통해서다. 바람도 문틈을 뚫는 황소바람이 더 시리다. 통로가 좁으면 공기 분자 부딪히는 횟수가 는다는 ‘베르누의 정리’를 몰라도, 겨울날 걷던 골목길의 매운바람을 기억하면 된다.
틈새로는 많은 걸 보되 많은 걸 놓친다. ‘꿀단지’ 국책사업 앞에서도 대덕특구 문틈으로만 보다 파김치가 됐다. “대덕특구 있는 우리…”의 동종교배는 “대덕특구 있는데 뭘 더…”의 딴죽걸이로 돌아왔다. 대전의 핵(核), 말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느님, 홉스의 운동, 쇼펜하우어의 의지, 보바리 부인의 ‘남자의 사랑’ 같은 대덕특구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노자의 경지 앞에 멈춘다. ‘문밖을 나서지 않고 세상을 알며 문틈을 엿보지 않고 하늘길을 본다’라는, 깨달음의 반복은 피곤하다. 웰메이드 대작이 시청률에 죽 쑤면 케이블업계에서는 ‘재방(再放) 피로도가 쌓였다’고 표현한다. 클래식 악기, 빽빽한 서가, 책상 앞에서 고뇌하는 사람, 추상미술 작품이 걸린 벽은 일반적으로 채널을 돌리게 하는 소품들이다.
지역 현안들이 꼭 그랬다. 성과가 연거푸 없자 수면제 탄 소품이 되고 말았다. 유치 실패한 로봇랜드-자기부상열차-첨복단지 시리즈에 세종시(행정도시) 같은 사안이 재방 피로도를 높이면서 지자체는 머쓱한 양치기소년 다 됐다. 당구의 ‘다마’(‘공’의 일본어)와 ‘담화’가 겹쳐져, 사람 없는 데서 하는 험담이 ‘뒷담화’다. 이제 지역 정론(正論)까지 ‘뒷담화(뒷다마) 치듯’ 무력할 때가 많다.
정당한 지역민의 요구는 또 완전히 어린애 옹알이 취급이다. 안 그래도 복잡한 충청권은 정운찬 총리 카드로 거지반 정치적 진공상태다. 충청 출신 내정자의 세종시 ‘원점 회복 불능, 원안 추진 불가’ 입장은 충청도민을 단체로 물먹인 꼴이랄까. 배후에서 엎치락뒤치락 조합을 달리하며 구설을 즐기는 세력들이 히죽거린다.
그들의 입을 다물려야 할 차례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매사 좋도록’은 유보하고 눈 부릅떠야 한다. ‘이자벨 아자니’. 지구상 최고의 눈빛에 선정된 배우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의 원천을 아는가. 나쁜, 나빠서 아련한 시력이다. 흐림을 흐린 대로 보는 눈. 화가 모네는 말년에 최악의 약시(弱視)로 불후의 <수련> 연작을 그린다. 하지만 현실을 대하는 눈에 ‘보일락말락’, ‘어슴푸레’란 없다.
사방팔방을 둘러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명징한 혜안이 요구될 뿐이다.
충청권이 흔들린다 한다 할수록 그렇다. 감각의, 시간의, 공간의 경계를 넘어 바람의 계절이 온다. 바람에 선비는 책을, 어부는 돛을 말린다. 처녀는 옷을 말리고, 바람에 휘날리는 처녀 치맛자락에 총각은 가을남자가 되듯이, 꿈틀대는 생물인 정치의 지형에도 크든 작든 변화는 있을 것이다.
지각변동은 아니라도, 그 어떤 변동의 소용돌이에 남은 현안이 잘못 휩쓸려서는 안 된다. 놓치고 땅 치는 이슈대응력, 대응논리와 대응방식부터 수정해야 한다. 음영만 더듬는 주변인(경계인) 노릇 그만하고 문밖에 나서자. 미디어 예술의 영역과 달리 현실의 ‘문틈’은 효과적인 기제가 아니다.
진행 중인 과학벨트, 저 『십팔사략』의 백마같이 홀연히 종적을 감춘 자기부상열차 집적화단지, 로봇연구·생산 클러스터, 근현대사박물관 등은 지난 대선의 지역 공약이었다. 사람이란 아버지의 죽음보다 누군가에게 떼인 돈을 오래 기억한다. 마키아벨리가 가만있었어도 사회적 행동의 바탕에 경제적 동기가 깔려 있다. 부인할 것 없이 지역 현안도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충청인들은 더 오래 기억할지 모른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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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식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