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영역으로 산책길 나선 예술
IMF시절 그림은 벌써 도심 흉물
도시디자인의 적, 조급함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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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룬 도시디자인은 동네를 ‘엣지 있게’ 만든다. 벽화뿐 아니라, 아산 온양온천역 뒤편의 콘크리트 옹벽과 담장의 입체화된 설치물은 도시 해상력을 높여 에지효과(edge effect)를 낸다. 도시의 어떤 치부를 얼버무리는 거북한 친절함이었다면 결코 거두지 못할 효과다. 풍경이 작품을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카인과 아벨’로 유명한 청주 수동 수암골 벽화는 어떤 각도에서나 수작이다. 민예총 솜씨인 벽화 ‘추억의 골목여행’은 요즘 한류 팬들에까지 손짓한다. 벽화사업 관계자들이 꼭 찾을 만하다. 2.9㎞에 이르는 이원방조제에 희망벽화를 그리려는 태안군 역시 ‘세계 최장’이 주는 긴장감을 늦출 필요가 있다. 시야도 넓힐 겸, 영동 경부선 굴다리 속의 국악과 포도밭 아이들 벽화나 울산 장생포의 고래 벽화라도 보고 오길 권한다. 상당한 영감을 얻지 않을까 한다.
고대의 지배층은 죽은 다음에도 영화를 누리고자 벽화를 그렸다. 반면, 지금 지자체의 그것은 당장 명물거리로 키우자는 동기가 대부분일 것이다. 자연히 일률적인 소재와 판박이 화법 일색이다. 남 따라 화려한 옷을 입어서인지 궁티마저 난다. 그에 비해 통영 몽마르트 동피랑마을, 부산 안창마을은 확연히 달랐다. 여성의 치마는 가장 어울리는 길이의 실루엣 찾기가 쉽지 않은데, 벽화도 마치 치마같이 까다로운 아이템이다. 그걸 바로 알았고, 적재적소의 디자인적 관점이 주효했다. 그래서 군더더기가 적다.
가령, 쭉 뻗은 가로수길은 그 자체가 입면경관(立面景觀)인데, 페인트 도장업자를 동원해 공연히 시각공해 유발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대덕구 ‘안산을 모자이크하다’와 같은 주민참여형에 있어서는 과정과 결과물 모두가 특히 중요하다. 지역과 주민의 소통 측면에서 천안 원성동 벽화마을의 전망은 밝다. 대전 정뱅이마을 벽화도 맑다. 수수께끼 그림같이 붕 뜨지 않으면서 주민과 친화하고 주변환경과 융화한다. 도시의 속살 한 페이지를 보고 느끼며 걷게 해준다. 나 홀로 벽화, 지자체 홍보판 같은 벽화에는 없는 고고한 분위기, 즉 아우라가 있다.
그 아우라는 지역 전체와의 조화 속에 일상 삶의 관계망에서 나오는 구조성 내지 특성이 벽화에 녹아들 때 생성되는 차이다. 대전 중앙로와 부산 광복로는 내용적으로 다르다. 천안과 당진과 청양은 발생학적 기원과 유래가 같지 않다. 숱한 경험이 쌓인 토양이 도시공간이며 오래 묵은 시간이 스며들면 문화가 된다. 이를 무시한 무원칙의 ‘뼁끼칠’(페인트칠) 규제 차원에서 작품 시안에 대한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
대충 그려 넣고, 이미지가 비오듯 내리면 우산을 쓴다는 식은 멍청한 발상이다. 동네의 얼굴 관리는, 화장발은 아랑곳하지 않고 덕지덕지 처바르고 보는 무흥삭막의 이미지 과잉을 회피해야 한다. 그리고 벽화사업 기간이 끝난 뒤, 유지·보수 예산을 확보 못해 애물이 되지 않게 나중 일도 생각해야 한다. 한밭도서관 올라가는 보리길을 걷는다 치자. 잠시 베토벤이 전원교향곡 악상을 찾아 하일리겐슈타인 길을 걷는 듯한 산보자의 기분에 젖는다. 그 기분은 변색되고 낙서 어룽진 벽화를 만나기 전까지다. 특수페인트 접착과 코팅, 아트타일 시공까지는 아닐지라도, 지속가능성은 벽화에도 적용된다.
왜 벽화인가, 벽화를 도시에 어떻게 대응·적응하는가의 고민은 더 해야 한다. 깨끗한 미관이라는 단순한 접근에서 출발했어도 디자인적 관점은 끝에 늘 부담으로 남는다. 느리면 패배한다는 미래학자의 예언은 골목문화에 날개를 다는 거리행정 영역에 안 맞는 얘기다. 호박에 줄 긋는 성급함과 조급함은 도심 재창조의 적이다. 지금의 희망근로에 해당하는, IMF체제 때의 도심미관 사업으로 탄생한 벽화가 어느새 도심의 흉물이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벽화사업은 벽에 ‘돈칠’하는 사업이 아니라는 살아 있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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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식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