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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광풍이 몰아친 듯한 '지방권력 대이동' 호들갑에는 정말 눈에서 불나게 하는 미성숙한 출발이 백스크린으로 작용했다. 무관심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주목되는 것은 전국 16개 시·도 단체장 모두와 다수 시·군·구청장들이 이구동성으로 소통을 강조한 점이다.
실제는 내 사람, 측근 심기로 권력 사유화 지적도 받았다. 지방의회 역시 소통을 말하며 소통의 부재를 조장했다. 상임위원회 배정을 하루 만에 뒤집은 대전시의회, 집안싸움으로 삐끗하게 첫 문을 연 충남도의회, 대전 자치구의회 의장단 구성 파행 등, 어디서 본 듯한 레퍼토리가 애처롭다.
현실의 지방자치는 이렇게 실존이 버겁다. 지방권력을 야당이 쥐었다 생각하니 한결 시끄럽게 들리고 완벽한 내용적 민주주의로 포장된 깔밋한 목표를 들이대니 비포장 험로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원래 좀 시끄럽다. 인디언들처럼 침묵과 눈빛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좋으련만, '개콘' '동혁이형'이 정치를 130데시벨의 부부젤라에 빗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치도 믿음(信)도 사람(人)의 말(言)로 쌓는다.
말로 말미암은 정치체계와 정책에는 양면 이상이, 최소한 양면이 있다. 이쪽의 규제 완화가 저쪽의 규제 강화가 된다. 중앙집권시대를 이끈 집중화 효율이냐 지방시대의 분산화 효율이냐에 따라 효율성의 가치도 싹 달라진다. 정파싸움이나 당쟁은 정치 후진성을 나타내지만 체제 측면에서 당파 싸움조차 없는 독재나 전제가 후진적인 것이다.
특별히 우리네 정당이 포장마차처럼 비쳐지는 연유가 있다. 미국의 156년 공화당과 182년 민주당에 비교하지 않아도 너무 짧은 정당 수명과 유관하다. 필자 태어난 뒤에 출몰한 국내 정당만 110여개, 정당 평균 수명은 2년 9개월이다. 사실 우리 정치에 대한 저평가는 역할모델 미국의 '이웃효과'가 크다. 그것이 지방자치에 고스란히 전이된다.
마찬가지로 서구적 시각으로 우리 지방자치는 뻔한 부부젤라 소리일지 몰라도 역사가의 진득한 눈에는 장족의 발전일 수 있겠다. 다만 중간의 말없는 다수가 튼실한 '포물선의 사회'를 형성하는 구조가 아니어서 극단의 목소리가 크고 소통도 어렵다.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곳곳에 불통, 불안, 불만, 불신의 징후가 도사린다. 국내 사회갈등비용이 GDP의 27%인 300조원이다. 소통은 돈이고 경제다. 전에 블로그에 올린 '농담'을 옮겨 보기로 한다. 곰과 토끼가 풀밭에서 나란히 '큰일'을 보고 있다. “토끼, 네 털에 똥 묻는 게 안 무섭나?” 곰이 묻고 토끼가 답한다. “똥? 하나도 안 무서워.” 말이 떨어지자 곰이 토끼를 덥석 잡아채 제 엉덩이를 닦는다.
이 가벼운 농담이 커뮤니케이션의 현실을 풍자한다. 이러저러한 소통 부재보다 나쁜 건 치명적 무능을 소통 부족으로 얼버무리는 얌체 짓이다. 소통의 관점에서 세종시와 4대강, 경제 살리기 등 현안 앞에 충청권 단체장들에겐 삼장법사의 긴 안목과 지혜 못지않게 요괴에 맞서 숲속의 위험을 꿰뚫는 손오공 타입의 리더십이 긴요한 시점이다.
문제는 다시 소통인데, 단군 할아버지 이래 지금처럼 소통이 강조되던 때는 없었다. 전제는 믿음이다. '미생지신'의 미생이 폭우에 쓸리는 위험을 감수하며 다리 밑에서 살아 기다린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더러는 우직함으로 생후 14일, 기저귀 찬 민선 5기를 지켜봐야 한다. 앞으로 4년, 지방은 아무데도 없다(nowhere)를 지금 여기에 있다(now here)로 바꾸려면 욕하면서도 무관심은 버려야 한다. 관심은 지방자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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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식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