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난순 교열팀장 |
학자들은 권력구도의 기본구조를 가족에서 찾는다. 루이 알튀세르가 가족을 '가장 끔찍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한 것처럼 남편, 아내, 자식의 관계라는 가족의 구조는 기만과 배반으로 엮어진 오이디푸스적 구조로 이뤄진다고 보고 있다. 동물들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야생의 포식자 늑대들도 철저한 서열에 따른 부계사회다. 하지만 호시탐탐 권력의 자리를 넘보다가 무리에서 축출되기도 하고 우두머리가 2인자, 3인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한다.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욕망이 있는 곳에 이미 권력관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녀사이 만큼 권력관계가 팽팽하게 유지되는 곳이 있을까. 프랑스 여성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작품화하는 걸로 유명하다. 악마에게 혼을 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자신의 치부를 거침없이 내보였다. 『탐닉』은 소련외교관과의 2년간의 만남을 기록한 일기다. 남자는 '지적이지도 않고 출세지향적인 속물'이다. 에르노가 명망있는 잘나가는 작가임에도, 변변찮은 남자는 '신'으로 군림했고 그녀는 '창녀'였다. 남자는 단지 수컷이라는 이유로 헤게모니를 쥐는 위치를 점했다.
권력은 '선한 사람을 악인으로 변화시키며 악인을 더욱 악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역사상 지도자들 중엔 권력의 논리에 종속돼 권력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히틀러도 처음엔 신중한 정치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을 쥐면서 자신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망상을 품게 되면서 정신병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 파멸하고 말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권력상실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내를 자살로 몰고가는 등 극단화된 폭력을 표출했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드러난 닉슨의 행적을 보면 인간이 권력에 취하면 알코올처럼 중독성을 갖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세계 제 1의 강대국의 지도자로서 재선을 위해 치졸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권력에 연연해하는, 한 인간의 정신적 허약함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강대국의 힘의 논리로 약소국에 대해 야비함을 서슴지 않는 게 미국이다. 그러나 워터게이트는 미국이 민주주의와 원칙이 살아있는 나라라는 걸 보여줬다. 거기엔 언론의 힘이 한몫했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집요하게 파헤치는 기자정신이 살아있었기에 '대통령의 음모'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 돼버렸다.
언론은 비판이 생명이다. 정부 정책이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든, 감시자의 눈으로 잣대를 들이댈 수 밖에 없는 게 언론의 생리다. 그러나 언론의 역할을 애써 외면하고 철저한 권력유지의 발판이 되거나 수구세력의 앞잡이가 돼온 부끄러운 자화상도 숱하게 노출했다. 반대로 자신들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균형감각을 잃은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재직 시절 보수 언론은 대통령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이 아닌 파괴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 무자비한 하이에나 습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통령의 학력, 표현방식 등을 문제삼는 보수 신문들의 의도적인 흠집내기는 극에 달했다. 타협을 모르는 노 대통령의 독단도 문제였다. 본질을 벗어난 비난일지라도 '눈엣가시' 같은 언론권력에 맞서 '맞장' 뜨겠다고 전투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옳지 않았다. 그것은 언론과 국민에게 이성적이지 못한 지도자의 포용력 부족이라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나르시시스트에 가깝다. 듣기에 달콤한 말만 가려서 듣고자 한다. 그것이 권력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함정이다. 대통령이든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든 지도자는 아부에 익숙한 나팔수를 가까이 두려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자신의 존재의미를 타인의 복종을 통해 확인하려는 심리일 게다. 영리한 지도자는 권력의 쓰임을 왜곡해 비판의 펜을 부러뜨려 굴복시키려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