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 오피니언
  • 우난순의 필톡

[우난순의 필톡]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 승인 2019-11-20 10:56
  • 신문게재 2019-11-21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시계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은 나를 사로잡는다. 프로이트를 추종한 달리의 그림 역시 꿈과 망상, 욕망으로 버무려져 기이함을 준다. 달리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는 어떤 강박적인 집착은 스페인 카달루냐 사람들의 오직 먹고, 마시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존재로서의 본능에서 출발한다. 달리의 본능에 대한 집착은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명한 '기억의 지속'도 꿈에서 본 녹아 흐르는 카망베르 치즈에서 유래했다. 시간이 그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측정된 시간의 무의미함과 기억의 집착!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의 지속은 유의미할까. 어느 철학자는 "인간에게는 과거를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앞서 일어났던 현상들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을 기록한 빅토르 프랑클은 존재 의미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는 수용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과거 경험했던 기쁨의 빛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빛나는 지를 들려줬다. '네가 경험한 것을 지상의 그 어떤 권력도 앗아갈 수 없으리니.' 경험이란 실존의 한 형태다. 과거의 모든 행동, 크고 작은 생각, 지나간 모든 일들이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그 기억은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여기, 기억을 잃어버린 이들이 있다. 자아를 잃어가는 서연(수애)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라며 오열한다. 나이 서른에 알츠하이머라니. 지형(김래원)이 점심식사를 마치기 전에 저녁 먹자고 데이트 신청할 정도로 매력있는 젊은 여성이 먹고, 싸는 본능만 남아 서서히 죽어간다. 본능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순수하지만 날 것 자체여서 역겨움을 주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창동은 추하고 더러운 것 뒤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했다. 영화 '시'의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성폭행 가해자를 손자로 둔 할머니의 죄의식과 고통,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해 찾아야 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이야기한다. 미자는 명사도, 동사도 잃어가는 치매 초기 환자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자 미자(美子·윤정희의 본명이다)가 진짜 치매에 걸렸다.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남편 백건우의 고통이 전해진다. "작년 성탄절엔 날 알아봤는데 올해 4월부터 절 잃어버리셨어요"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딸 진희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며 나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올해 90인 나의 엄마도 치매를 앓는다. 엄마도 기억을 잃고 있는 중이다. 손주들의 이름이 헷갈리고 날짜와 시간, 공간 개념이 흐릿해지며 느닷없이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예전의 단정한 성품이 하나하나 흐트러지는 엄마를 대할 때마다 당혹스럽기만 하다. 큰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어느 가을 엄마는 차를 타고 가면서 "단풍 참 곱다. 이렇게 좋은 걸 못 보고 왜그리 서둘러 갔는지"라며 한탄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떤 어미가 온전할 수 있을까.

치매는 최소한의 삶의 존엄성을 지키기 어려운 질병이다. 기억이란 도대체 뭘까. 한 사람에게서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은 본능만을 향해 달려가는 퇴행이다. 사람의 삶은 기억으로만 남을 뿐인데, 기억이 없어진 나는 누구인가. 리어왕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없는가?"라고 호소했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은행잎이 바람에 나비처럼 날린다. 숨막힐 듯한 계절의 아름다움에 발길을 멈춘다. 그 낙엽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억의 파편처럼 보인다. 이창동은 미자의 나이는 하나하나 잊어가는 시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해 질문할 나이라고 했다. 잎새를 떨군 앙상한 나무 위의 하늘이 텅 비어 푸르렀다. 나의 엄마와 미자는 다시 아이가 된다.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李정부 2차 공공기관 이전 초읽기…대전 '우선 배치' 촉각
  2. 가을 제철 수산물 가격 들썩… 꽃게·전어 두 배 급등
  3. 온통대전, 카드 없이 QR코드로 결제한다… 정부 지원율 변화도 관심
  4. 스토킹 피해 신고했던 전 연인 살해 40대 구속
  5. 대전혁신센터, 스케일업 투자지원 민간운영사 업무협약
  1. 대전시의회, 이효식 대전도시공사 사장 후보 '인사청문회'
  2. 국정자원 대전 잔류 위해 추가 부지 발굴… 유치 경쟁 속 대응 본격화
  3. '양성자 암치료센터' 건립 나선 세종, 중부권 첨단의료 거점 노린다
  4. '충효예 정신' 충남 교육현장에 본격… ‘사랑의 일기’는 축소 운영
  5. 박수현 충남지사, 'UNDP AI 허브' 충남 유치 사활

헤드라인 뉴스


`세종 행정수도` 11월 중대 기로…법안 심사에 예산 확보전까지

'세종 행정수도' 11월 중대 기로…법안 심사에 예산 확보전까지

세종 행정수도 완성을 위한 입법과 예산 확보 절차가 맞물리면서 중대 분수령을 맞이했다. 11월 국회에서 행정수도특별법 심사와 중앙행정기관 추가 이전을 뒷받침할 재원 확보가 시험대에 함께 오르면서다. 여기에 세종시 재정 문제와 얽힌 핵심 법안까지 일몰을 앞두고 마지노선에 봉착하면서 정기국회 내 현안들을 매듭지을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28일 국회에 따르면 내달부터는 내년도 본예산에 대한 상임위원회별 예비심사가 본격화할 예정이다. 당장 이번 예산 심사에선 지난 13일 정부가 발표한 2차 중앙행정기관 세종 이전 계획안을 다루게..

대전이노베이션아카데미, `AI 혁신의 새 장을 열다`
대전이노베이션아카데미, 'AI 혁신의 새 장을 열다'

대전의 미래 산업과 대한민국 소프트웨어(SW) 생태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거점인 '대전이노베이션 아카데미'가 28일 14시 대전시 서구 월평동서 공식 개소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다. 교육 과정은 AI 활용 인재를 양성하는 네이티브 과정(5개월)과 인공지능 올인원 과정(18개월)으로 운영된다. 대전시와 진흥원은 대전이노베이션아카데미 개소를 시작으로 지역 AI 및 소프트웨어(SW) 생태계를 이끌어갈 핵심 거점으로 이끄는 한편, 대전시는 대전이노베이션아카데미가 대한민국 ICT 생태계의 판도를 바꾸고, 지역 성장의 새로운 동력을 창..

[르포] 합친 지 27년, 도시 이름까지 바꿨다… 단바사사야마의 생존법
[르포] 합친 지 27년, 도시 이름까지 바꿨다… 단바사사야마의 생존법

수도권 일극 체제와 지방소멸 위기에 대응할 해법으로 추진된 충남·대전 행정통합이 첫 출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출발선에 섰다. 하나의 경제·생활권을 구축하고 지역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이었지만, 주민 동의와 재정·권한 이양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분명해졌다. 행정구역을 하나로 묶는 것만으로 통합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행정통합을 경험한 일본과 대만 역시 행정 효율화와 재정 기반 강화라는 기대 속에 주민 갈등과 재정 부담, 지역 간 불균형이라는 숙제를 마주했다. 본보는 일본의 헤이세이 대합병과 오사카 행정체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미래 진로직업 체험 미래 진로직업 체험

  • 올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씨 올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씨

  • ‘스토킹에 의한 여성 살해 국가가 책임져라’ ‘스토킹에 의한 여성 살해 국가가 책임져라’

  • 스토킹 살해 피의자 영장실질심사 스토킹 살해 피의자 영장실질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