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간첩사건 25주기] 北 위장 전문 띄우고 7개월 잠복작전…'경찰 이름으로 견디어'

  • 사회/교육
  • 사건/사고

[부여간첩사건 25주기] 北 위장 전문 띄우고 7개월 잠복작전…'경찰 이름으로 견디어'

김학구 전 서울시경 부실장 검거작전 회고
7개월 사찰서 잠복하며 북에 위장전문 전송
"작전 중 순직경찰 슬픈 마음 금할 수 없어"

  • 승인 2020-10-24 12:31
  • 수정 2021-05-09 22:20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김학구1
1995년 부여 무장간첩 사건 당시 사찰에서 7개월간 잠복수사를 지휘한 김학구 씨가 23일 경찰충혼탑에서 순직한 나성주-장진희 경사에게 추모사를 읽고 있다.
1995년 10월 24일 충남 부여 정각사에서 무장간첩 검거 작전을 수행한 김학구(84·사진) 씨가 23일 부여 충혼탑을 찾아 작전 중 순직한 두 명의 영령을 위로하고 유가족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는 포섭한 고정간첩을 활용해 잔여 남파간첩을 검거하는 작전을 기획하고, 직접 정각사에서 7개월 잠복하며 김동식-박광남 일당과 처음 교전을 벌인 장본인이다.

지난 23일 오후 충남 부여군 석성면 경찰충혼탑에 옛 서울시경 소속 김학구 씨가 찾아와 참배하고 직접 쓴 추모사를 낭독했다.

김 씨는 추모사를 통해 "아~ 슬프도다 남극의 별 둘 떨어지니, 산천을 울고 초목은 몸부림 쳤다 … 슬픔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며 충혼탑에 고개 숙였다.

김 씨는 1963년에 경찰에 투신해 32년 8개월간 대공업무를 전문했으며, 그 공로로 보국훈장과 옥조근정훈장을 받았으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부여 간첩사건에 대해서도 함구해왔다.

이날 김 씨는 "더 늦기 전에 제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전 중에 전사한 두 명의 용사와 유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라며 이유를 밝혔다.

그는 부여 간첩 검거작전 당시 일찍이 포섭한 고정간첩 '봉화1호'를 활용해 남한에 숨어든 간첩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봉화1호는 북한이 남한에 침투시킨 50대 남성 공작원으로 남파 직전 북 최고통수권자와 단독 면담을 할 정도로 공작지도부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다.

남한에서는 스님으로 위장해 종교단체를 포섭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980년 경찰에 검거되면서 역용공작원(이중간첩)으로 남한을 위해 활용됐다.

1995년 우리 정보기관은 고정간첩의 무전기를 활용해 봉화1호가 나이 들어 더는 활동하기 어려우니 북으로 귀환하기를 바란다는 위장된 전문을 북측에 보냈고, 장소를 특정하라는 북의 회신에 '부여 정각사'를 지목해 재회신했다.

이로써 부여는 봉화1호가 생활하던 곳이 아니었으나 작전상 남파 공작원과 접선하는 장소가 되었고, 서울시경과 정보기관을 주축으로 잠복·체포조가 구성됐다.

김학구3
1995년 부여 간첩 검거작전을 지휘한 김학구 씨가 23일 당시 사찰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와 직원들은 그해 4월부터 처사와 승려, 등산객 등으로 위장해 사찰과 사찰 입구 빈집에서 생활 겸 잠복을 시작했다.

김 씨는 "남한에서 더이상 활동할 수 없는 봉화1호를 북으로 데려가기 위해 남파간첩이 부여 사찰로 찾아온다는 의미였다"라며 "그러나 접선하는 날짜와 시간, 인물을 사전에 정해주지 않아 수 개월간 긴장을 유지한 채 기다리는 상당히 어려운 작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때문에 사찰에 매복한 경찰과 정보당국은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 지 모르는 간첩을 기다리며 동시에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북한 정권 수립일(9.9절)과 노동당 창건일(10.10절)도 아무런 접선 없이 지나가면서 잠복 7개월 만에 부여에서 철수하자는 내부 의견이 나왔다.

김 씨는 재차 북 공작지도부에 의중을 파악하고자 위장 전문을 보냈고, 이에 "자리를 비우지 마라"는 북 회신을 받음으로써 남파 간첩이 이곳에 온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밤사이 비가 내려 사찰 앞마당에 낙엽이 축축이 쌓인 10월 24일 낮 1시께 낯선 남성 한 명이 경내에 들어와 주지스님을 찾았다.

낯선 이를 처음 맞이한 게 처사로 위장해 빗자루를 들고 있던 김 씨였고, 대화 중에 상대가 남파간첩임을 확인했다.

김 씨는 "낯선 젊은이가 주지스님을 찾으며 특정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게 북측과 사전에 약속한 접선 암호명이었고, 시간을 끌 요량으로 저 아래 밭에 가보라고 일렀다"라고 설명했다.

이때 낯선 남자가 간첩 김동식이었고, 그는 길목에 숨겨둔 간첩 박광남을 손짓으로 불러내 김 씨가 가르키는 길 아래 난초재배장으로 돌아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김 씨는 부하 요원들에게 실탄 무장을 지시하고 사찰을 빠져나가는 길목을 차단하도록 했다.

그리고 시작된 체포 작전에서 간첩 일당은 품에서 권총을 빼들어 총격을 가하며 저항했고, 결국 사찰을 벗어나 인근 태조봉으로 도주했다.

김 씨는 "나중에 알게 됐지만, 간첩 일당은 권총에 독총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서 접선 사찰에 찾아왔는데, 이렇게 무기를 갖추고 접선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웠다"라고 설명했다.

간첩 일당이 산 속으로 몸을 숨긴 직후 사찰에 있던 유선전화기로 군과 경찰에 신고됐고, 이때부터 부여경찰과 32사단이 투입되는 부여 간첩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도주한 간첩 일당은 산으로 숨어들어 신분증 등을 땅 속에 매설했고 대전방향으로 도주하던 중 길목차단에 나선 부여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여경찰 나성주 경사와 장진희 경사가 간첩이 쏜 총에 총상을 입고 순직했고, 송균헌 경사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또 간첩 김동식은 장진희 경사와 몸싸움 끝에 다리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생포됐고, 도주한 박광남은 10월 27일 조촌면 신암리 야산에서 군과 대치 중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날 숨졌다.

김학구 씨는 "남북이 분단돼 겪는 고통이 한국전쟁 때만 있던 게 아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이런 위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라며 "누군가 당시 사건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라고 전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송언석 "이재명 대통령 표 무효 처리돼야"
  2. 한국스마트혁신기업가협회, 5월 가정의달 기념 인문학 특강 성료
  3. 李대통령 투표용지 노출공방 "선거법 위반" vs "억지공격"
  4. 문봉길 충남선관위원장, 사전투표 현장점검
  5. [세종시 동네 공약 해부] 어진·나성 표심 가를 핵심은… “문화·상권 활성화” vs “교육·정주환경 개선”
  1. 대청병원, KB라이프파트너스 HO&F지사 업무협약 체결
  2. 6·3 지선 사전투표 첫날 마감…대전 10.75%·세종 12.52%·충남 11.46%·충북 11.93%
  3. 장철민, 조상호 지원 사격 "세종의 새 미래 그려나갈 적임자"
  4. 소진공, 법률자문 등으로 폐업 경영위기 소상공인 법률지원 강화
  5. 박수현 "민선8기 성과 등 지적, 충남 현주소 파악하기 위한 발언"

헤드라인 뉴스


[드림인대전] 바이올린 소녀! 대전에서 인생 2막 링을 흔들다

[드림인대전] 바이올린 소녀! 대전에서 인생 2막 링을 흔들다

조금 전까지 링 위에서 매서운 주먹을 날렸던 아웃파이터가 인터뷰 자리에 앉자 영락없는 24살 청춘으로 돌아왔다. 대전시체육회 소속의 복싱 선수 서연주(24)씨 이야기다. 링 아래에선 대전의 유명 빵집 이야기로 눈을 반짝이지만, 링 위에만 서면 무대를 평정하는 독보적인 정상급 테크니션으로 변신한다.국내 여자 아마 복싱 선수는 아직은 저변이 얇다. 타 종목에서 전향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서연주 선수 역시 태권도를 하다 전향한 케이스다. 출발은 늦었음에도 성장 속도는 매섭다. 태권도로 다져진 유연하고 빠른 스텝은 복싱에 그대로..

프랜차이즈 카페마다 말차라떼·밀크티 카페인 함량 최대 `4배`
프랜차이즈 카페마다 말차라떼·밀크티 카페인 함량 최대 '4배'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판매 중인 말차라떼와 밀크티 카페인 함량이 업체별로 최대 4배 차이가 벌어지는 조사가 나왔다. 28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국내 주요 프랜차이즈 카페 6개 브랜드의 말차·녹차라떼 6종과 밀크티 6종 등 총 12개 차음료를 대상으로 품질과 안전성, 가격 등을 비교한 결과 카페인 함량은 1잔 기준 45~172mg였다. 제품 간 최대 4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우선 말차·녹차라떼 중에선 빽다방 말차라떼가 93mg으로 가장 높았다. 이어 스타벅스 제주 말차 라떼 81mg, 이디야 커피 말차라떼 70mg, 컴포즈커피 그린..

`경비실이 빈소가 됐다`, 서산 경비노동자 사망에 노동계 강력 규탄
'경비실이 빈소가 됐다', 서산 경비노동자 사망에 노동계 강력 규탄

서산지역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던 70대 경비노동자가 경비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가운데,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예고된 사회적 참사"라며 서산시와 고용노동부를 강하게 규탄하고 나섰다.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서산태안위원회와 노동시민사회단체는 28일 공동 기자회견문을 통해 "또 한 명의 고령 경비노동자가 차가운 경비실 바닥에서 생을 마감했다"며 "언제까지 경비실을 노동자의 빈소로 방치할 것이냐"고 비판했다. 이들은 26일 새벽 서산의 한 아파트 경비실에서 휴식 중이던 70대 경비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과 관련해, 열악한 노동환경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소중한 한표 행사하는 시민들 소중한 한표 행사하는 시민들

  • 사전투표하는 허태정 대전시장 후보 사전투표하는 허태정 대전시장 후보

  • 지방선거 후보자들과 함께 투표하는 박용갑 국회의원 지방선거 후보자들과 함께 투표하는 박용갑 국회의원

  • 사전투표소 설치 사전투표소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