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여행] 31-국물에 말아 먹는 묵사발 군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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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31-국물에 말아 먹는 묵사발 군침난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 승인 2024-05-20 17:03
  • 신문게재 2024-05-21 8면
  • 김지윤 기자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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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향토 구즉 묵마을 안내 표지판. (사진= 김영복 연구가)
'묵사발' 하면 시쳇말로 '얻어맞거나 하여 얼굴 따위가 형편없이 깨지고 뭉개진 상태를 속되게 이르는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묵이 말랑말랑하여 쉽게 형체를 갸름하기 힘들 정도로 뭉그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전 구즉마을의 '묵사발'은 사전적 의미인 '묵을 담은 사발(沙鉢)'을 뜻한다. 호남고속도로북 대전IC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몇 개의 간판 아랫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보인다. 이 길 한쪽에 '구즉 묵 마을'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곳의 아무 집이나 들어서도 집집마다 특유의 양념과 묵 음식으로 몸과 마음의 허기를 달랠 수 있다.

대전시 금병산 줄기를 따라 박산, 적요산, 오봉산, 불무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특히 이 산들에는 참나무가 많아 도토리가 지천으로 떨어져 있고, 인근 서구의 탄방동은 우거진 참나무 숲에서 참나무를 베어 숯을 굽는 집들이 많아 마을 이름을 '숯방이'로 부르다가 뒤에 '숯뱅이'로 불렀으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여 탄방동(炭坊洞)이라 했다고 한다.

한편 유성구 구즉동의 인근 오봉산에도 유난히 참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도토리가 지천이었다.

이 참나무를 상수리나무[橡木]라고도 하는데, 그 열매를 상수리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을 통칭 참나무라고 하고 그 열매를 통칭하여 도토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상수리나무와 상수리도 참나무와 도토리에 대한 범칭으로 쓰였을 수 있다.

저목(樗木)과 역목(木)은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말한다. 이는 쓸모없는 산목(散木)을 의미한다. 재질이 좋은 나무는 빨리 베어져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는 반면, 쓸모없는 나무는 쓸 곳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천명을 누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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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서구 우명동 보호수 참나무. (사진= 김영복 연구가)
그러나 상수리나무가 전혀 쓸모없는 나무는 아니다.

영조(英祖)는 동지(同知) 이천구(李天球)가 '토성의 꼭대기는 너비를 열 길[丈]로 하고 성 안팎으로 상수리나무와 밤나무를 세 줄로 빽빽이 심어서 세월이 오래 되어 나무가 자라게 되면, 전란을 당하였을 때 세 길 정도만 남겨 두고 그 위 줄기는 가로로 묶고 그 아래를 촘촘하게 울타리같이 방패 모양으로 그 사이에 줄줄이 세워 두면 의거할 곳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고, 또 그사이에 숨어서 조총(鳥銃)과 시석(矢石)을 쓴다면 견고함이 석성(石城)보다도 더 나을 것입니다'라고 상서하자 비변사들에게 상수리나무와 밤나무를 심어 성(城)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고, -『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36년(1760) 1월 22일-쓸모없는 나무로 알려져 있기에 상수리나무는 사단(祀壇) 앞에 큰 아름드리를 자랑하며 신주목(神主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徐有, 1764~1845)가 편찬한 숙부 명고(明皐) 서형수(徐濚修 1749-1824)의 문집 『명고전집(明皐全集)』 제1권 [명고 팔영(明八詠)] 에는 '園拾子(곡원습자)상수리나무 동산에서 도토리 줍기'라는 시를 읊었다.

명고(明皐)는 사방 등성에 소나무, 노송나무, 개암나무, 밤나무를 심고, 상수리나무를 또 반쯤 섞어 심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아이를 불러 광주리를 들고 가서 절로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이듬해에 씨 뿌리기 할 때까지 저장한다. 이 때문에 '상수리나무 동산에서 도토리 줍기'라고 한 것이다.

"蕭蕭落葉澹山庄(소소낙엽담산장)쓸쓸하게 잎이 져 산장이 담연할 제 漫拾前林子黃(만습전림곡자황)느긋하게 앞산에서 누런 도토리 줍네. 盡日行隨風急處(진일행수풍급처)종일토록 바람 급한 곳 따라다니다 보니 十分閒事却成忙(십분한사각성망)몹시 한가한 일이 도리어 바쁜 일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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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사발. (사진= 김영복 연구가)
이 시를 보면 가을걷이가 끝나고 한가롭게 도토리를 줍는 풍경을 읊었다. 기승 양구에서는 잎이 진 늦가을 가을걷이가 끝나 한가로워진 때 심심풀이 삼아 도토리를 줍는 모습을 그렸고, 이어 전결 양구에서는 심심풀이 삼아 시작한 일이 도리어 바쁘고 고된 일이 되어 버렸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평성 '양(陽)' 운을 쓴 평기식 칠언절구이다.

명고(明皐)의 시에 나타난 장면처럼 참나무가 울창한 곳에는 산에 도토리가 지천이었다.

숙종(肅宗)은 하교하기를 "흉년의 구급(救急)은 상수리나무의 열매만 같음이 없는 까닭에, 일찍이 이에 유의(留意)하여서 분부하여 대궐 안의 여러 곳에서 착실하게 주워 모으게 하였으나, 이것도 또한 열매 맺지 아니하여 얻은 것이 겨우 20두(斗)인데, 뜻이 백성을 구(救)하는 데 있다면 반드시 많고 적음에 구애(拘)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肅宗) 21년 을해(1695) 9월 19일-

이렇듯 옛날부터 도토리는 흉년이 들면 아주 요긴한 구황식물이었고, 풍년이 들면 '개밥의 도토리'처럼 개들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구즉마을 사람들이 6.25 한국전쟁 이후 굶주림이 극심했던 시기 도토리를 주워 다가 묵을 쑤어 판 것이 구즉 묵의 시작이라고 한다.

구즉 묵 마을은 솔밭식당의 고 강태분(2009년 83세로 별세)할머니를 시작으로 만들어졌다. 고 강태분 할머니는 스무 살 무렵 시집와서 도토리를 주어 묵을 쒀서 팔았다고 한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 모두가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나이 어린 강 할머니는 동네 산자락에 많은 참나무에서 도토리를 따 묵을 쑤어 소쿠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았다.

그러다가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열 명 정도가 겨우 앉을만한 공간에 비닐을 치고 작은 식탁 5개를 놓고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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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과 비빔밥. (사진= 김영복 연구가)
그 후 묵 집은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10 여 곳 정도였던 묵집이 1980년대 초부터 농가부업 생계 수단으로 묵 마을이 형성됐는데 특히 채 썬 묵에 멸치와 다시마로 만든 육수를 붓고 잘게 썬 김치와 김을 섞어 먹는 묵밥이 인기를 끌었다.

구즉 묵마을이 더욱 유명하게 된 계기는 1993년 대전에서 열린 엑스포를 빼놓을 수없다. 대전에서 국제적인 행사를 치르면서 이 지방 재료를 쓰면서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으로는 당시 묵음식이 제일 우수하다고 판단하여 대전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지정한 것이다. 한편 2002년 월드컵 경기 당시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을 응원하기 위해 고 김대중 대통령이 대전을 찾았다.

이때 구즉의 묵 맛을 알고 있던 김대중 대통령은 모든 수행원을 비롯해 330인분의 묵밥을 주문해 먹었다고 한다.

도토리를 이용한 음식에 대해 최초로 등장하는 고문헌은 신라 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이 쓴 『고운집(孤雲集)』이다.

이 책 제2권에 나오는 '眞監和尙碑銘?竝序(진감 화상 비명 병서)'를 보면 "먹는 것은 거친 음식도 맛있게 여겼으며, 도토리와 콩이 뒤섞인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다."라고 나온다.

조선후기 역사학자이며 실학자인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동사강목(東史綱目)』에 고려 충렬왕 24년 2월에 '왕은 백성의 문제에 마음을 썼다. 흉년에 백성이 굶주린다 하여 반찬을 줄이고 궁중 주방에 도토리[橡實]를 가져오게 하여 맛을 보고, 여러 도의 안렴사를 불러서 백성을 다스리는 문제를 말해주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음식을 먹여서 보냈다.'라고 나온다.

한편 고려 말 유학자이며 문신인 이달충(李達衷·1309~1383)은 '산촌잡영(山村雜詠)'에서 "楓爲器(풍영촉이위기)단풍 옹이 찍어다가 그릇 만들고, 橡肥收可(상비수가령)도토리 살쪘으니 삶아 배불리 먹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때는 도토리로 묵을 쑤어 먹기보다 주로 삶아서 그대로 먹거나 밥에 섞어 먹었던 같다.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인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시문집인 『갈암집(葛菴集)』부록 제5권 '또 족손(族孫) 이동보(李仝輔)'라는 시문에"綿酒飯(면주서반)면주와 서반이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서반(?飯)은 '도토리밥'을 말하는 것이다. 서속(粟)이라고도 한다.

묵이란 말의 어원은 『명물기략(名物紀略)』에 의하면 "녹두가루를 쑤어서 얻은 것을 삭(索)이라 한다. 속간(俗間)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묵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또, 『사류박해(事類博解)』에서는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보았는지 녹두부(綠豆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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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부침개. (사진= 김영복 연구가)
18세기 전반기에 저술된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 "청포는 녹두를 가지고 두부와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 다만 자루에 넣어 누르지 않고 나무그릇에 담아 응고시킨 후에 쓴다"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1825년에 나온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녹두묵을 가늘게 썰어서 나물을 만들어 초장에 버무려 먹으면 맛이 심히 좋다"고 하였으며, 18세기 말의 『경도잡지(京都雜志)』와 19세기 전반기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녹두묵 나물에 대하여 "잘게 썬 녹두묵에 돼지고기, 김을 버무리고 초장으로 양념한 것인데 매우 시원하여 늦은 봄에 먹음직하다"고 나와 있다.

구즉 묵마을에서는 묵, 묵사발, 묵무침, 도토리 부침게 등 도토리나 묵을 이용한 메뉴들이 다양한데, 묵사발은 '묵말이'라고도 부른다.

이 묵사발은 간장 물에 일정한 길이로 썬 도토리묵을 소복히 담고 그 위에 김가루와 깨소금, 고춧가루를 올린 것이다.

묵사발과 함께 신김치와 소금에 삭히 고추가 맛을 더해 주며, 국물 맛이 깊고 향긋하다.

다만 긴 묵을 먹으려면 신기(神技)에 가까운 여간한 젓가락 솜씨로는 먹기 힘들다.

젓가락으로 집으면 자꾸 미끄러져 빠져 나가기 때문에 대부분 젓가락 대신 숟가락을 이용한다.

도토리의 영양성분과 함량은 수종(樹種)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도토리 대부분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아미노산, 무기질, 비타민 폴리페놀 등 우리 몸에 좋은 다양한 영양성분들이 들어 있다.

특히 도토리의 쓴맛을 내는 타닌성분은 식물이나 동물, 해충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물질로 우리 몸에 활성산소에 대응하고, 지방 대사에 관여하는 등 다양한 작용으로 건강을 돕는 역할을 한다.

한편 도토리는 혈중 콜레스테롤과 혈당수치를 낮추고, 장운동을 돕는 섬유질도 풍부하게 들어 있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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