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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균 소장 |
그것도 모르고 봄나들이에 나섰다. 미리 알았지만, 꽃샘추위 정도야 가볍게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날씨는 하루 사이에 영상 20도에서 영하의 날씨로 곤두박질쳤다. 입은 옷은 봄인데 날씨는 한 겨울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혹독한 폭설은 그치지 않았다. 모든 게 멈춰버린 눈 덮인 도시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다. 유일한 이동수단은 도보뿐. 푹푹 빠지는 눈길을 뚫고 큰 길까지 걸었다. 하지만 끝이 안 보인다. 가까스로 큰 길까지 나왔다. 아주 간혹 버스들이 오간다.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작은 희망을 찾은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으로 모여들었다. 인산인해다.
초조해 하는 나와는 달리 중국인들에게는 그래도 여유가 있다. 대륙의 기질일까. 비슷한 일들을 자주 경험한 까닭일까. 나처럼 봄옷 차림도 있다. 그런데 나만큼 추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백방으로 모바일 택시를 찾았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길가에 서있던 빈 택시를 발견했다. 작은 희망을 갖고 달려갔지만 절레절레 고개만 흔든다. 거리의 차들은 헛바퀴 돌지 않으면 다행이다. 크고 작은 추돌 사고는 곳곳에서 벌어졌다. 오르막길 차들은 차선과 관계없이 뒤엉켜 멈춰 섰다. 온 도시가 마비된 상황이다. 갈 길은 먼데 갈 방법이 막막하다.
무슨 차든 기회만 되면 타야지 결심했다. 외국인임을 안 몇몇 중국인들의 따뜻한 배려가 고맙다. 가까스로 얻어 탄 버스, 버스 안은 빈틈이 없다. 서툰 중국어로 도움을 청했다. 기사 아저씨의 자상한 안내가 언 몸을 녹인다. 이렇게 몇 번을 갈아타고서야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다. 날은 이미 저문 지 오래다. 온 도시가 잠들고 얼어붙은 한밤중이다. 몸에 힘이 풀렸다. 매서운 한파 속 기적 같은 생존체험이다.
기상도 흐름상 오늘의 산동 날씨가 내일의 한국날씨다. 비록 힘은 풀렸어도 오늘의 일들을 혼자 알고 있기가 아깝다. 꽃샘추위 경보령을 한국 지인들에게 알리고는 절절한 생존체험을 메모로 남겼다. 변화무쌍한 산동 제남의 봄 날씨 체험담이다.
오래전 신짱 배낭여행 중 예약된 기차를 놓쳐 하루 온종일 역사에서 지샌 기억도 있다. 한여름 폭우로 지연된 비행기 때문에 내몽고 행 기차 시간을 헐레벌떡 가까스로 맞춰 북경서역으로 달려갔던 기억도 있다. 하얼빈공항의 폭설로 반드시 지켜야할 한국에서의 약속을 포기해야할 상황에서 반나절 이상 소요되는 북경공항까지 달려가서 한국행 마지막 비행기를 탄 경험도 있다. 중국에서의 추억 속 기적 같은 극한 체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산동 제남의 봄 날씨는 예측불가로 유명하다. 봄철 한 계절에 사계절이 모두 들어있다고 말할 정도다. 설마하며 철지난 겨울옷들을 한국으로 보냈다. 곧 여름이란 생각이 들었던 날씨가 하루아침에 영하의 날씨로 변할 줄 누가 알았으랴. 영락없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그래도 중국인들의 낙천적 성격이 빛난다. "비바람이 봄을 돌리려 해도(風雨送春歸), 흩날리는 눈발은 봄을 맞이할 수밖에(飛雪迎春到)"란 마오쩌둥의 시를 읊조린다.
세찬 비바람과 찬 눈이 겨울을 상징한다면 화사한 꽃은 따뜻한 봄을 상징한다. 군자가 매화를 좋아한 까닭은 혹독한 겨울을 제일 먼저 이기고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매화는 봄이 왔음을 알린다. 하지만 매화가 필 무렵엔 백설(白雪)이 여전하다. 매화와 백설의 공존이다. 선현들의 시에도 매화와 백설은 함께 등장한다. 백설 위에 핀 매화가 매화 예찬의 주된 분위기다. 3월 꽃샘추위로 찾아온 산사대 캠퍼스에 핀 납매와 홍매를 바라보며 매서웠던 생존체험과 지난 옛일들을 기억해 본 것이다.
/김덕균 중국산동사범대학 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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