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소년공, 여공, 그리고 위장공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소년공, 여공, 그리고 위장공

송기한 대전대 교수

  • 승인 2025-06-23 09:54
  • 신문게재 2025-06-24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송기한 대전대 교수
송기한 대전대 교수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자신은 가난했고,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세상이 더러워" 흰 당나귀를 타고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산골'로 가려 했다. 백석이 나타샤와 더불어 산골로 떠나려 했던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기생을 사랑했지만 세상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여러 좌절이 생겨났다. 한 사람은 순수한 사랑을 용인하지 않는 현실에 실망하여 세상을 버리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한 현실을 저주하며 사랑했던 사람만을 생각하고 혼자 살고자 한 것이다.

백석을 산골로 이끌었던 두 번째 이유는 식민지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제와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국을 살뜰히 사랑했던 백석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 번째 이유는 가난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신을 '가난한 나'라고 했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름다운 나타샤와 하얀 눈을 맞으며 산골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풍족한 것들이 널려 있는데, 굳이 거기로 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사랑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산골에 가야 했던 백석의 처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최근 우리에게 화두가 되었던 것이 이른바, 소년공과 여공, 그리고 위장공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뿌리는 '가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소년은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현실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가난이 그를 어쩔 수 없이 소년공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공도 마찬가지다. 소년공보다는 좋은 환경을 가졌지만, 그 역시 삶의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위장공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그는 이 시대 가난이라는 보편적 조건으로부터 한걸음 벗어나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정식으로 학교에 다녔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현실적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을 알고자 했고, 이를 초월해줄 수 있는 뿌리인 노동이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이때 노동하고 싶다고 해서, 공장에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곧바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취업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분을, 학력을 속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졸 학력을 감추고 위장공이 되었다.

소년공에게 노동은 실제적인 영역이었고 위장공에게 그것은 체험적인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들은 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었다. 그 나름대로의 이상세계를 그려본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위장공은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나타샤를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나타샤, 곧 여공과 더불어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갈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은 백석이 가고자 했던 산골이 아니었다. 그러한 까닭에 그곳으로 가는 일은 "세상한테 지는 것도 아니고, 세상 같은 것이 더러워서" 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노동 체험을 이해하고, 혼탁한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바꾸고 싶었기에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소년공에게 나타샤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낭만적 그리움만으로 그녀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타샤와 함께 갈 당나귀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가져야 할 이상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소년공과 위장공은 그들의 꿈이 있는 산골로 무작정 나아갔다. 위장공은 노동의 체험 속에서 만난 나타샤가 있었기에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공은 노동이 삶 그 자체였기에 함께할 동반자 없이 낭만적 그리움만으로 그곳에 가는 길이 힘겨웠다. 그래서 이상적 공간보다는 현실 세계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 모색의 과정에서 저 멀리 "흰 눈이 푹푹 나리는" 조국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그는 산골보다는 거기로 가고 싶었다. 맘을 바꾸니 당나귀도 어디선가 나타났다. 소년공은 당나귀에 올라타고 고삐를 조국으로 돌렸다. 조국을 만났기에 소년공은 더없이 기뻤다. 함께 가던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음"을 터뜨렸다. /송기한 대전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아산시, 1조원대 'AI모빌리티' R&D사업추진심사 대상 지정
  2. [르포] 트램 공사에 시민 불편 가중…경적·호루라기 뒤엉키고 민원 잇따라
  3. 전국장애인체전 개막 D-7… 세종시, 역대 최다 메달 정조준
  4. 인미동 "대전·충남행정통합, 시민과 함께 답 찾아가야"
  5. 세종시 사격팀 맹위… 전국장애인체전서 메달 싹쓸이
  1. 천안 K-컬처박람회, 주말 맞아 '가족·한류 맞춤형' 콘텐츠 쏟아진다
  2. 중기중앙회, '옐로우 플리마켓' 참여 소기업·소상공인 모집
  3. 천안시, 가을맞이 태학산 가족 산림치유 프로그램 운영
  4. 한기대 산학협력단, 'Best of CHAMP+' 성과평가 우수기관 선정
  5. 천안시, 제6기 주거복지위원 위촉…취약계층 주거안정 대책 논의

헤드라인 뉴스


[산단의 경계, 기업의 한계] 커지는 기업, 가로막힌 확장…대전산단 ‘규제의 벽’

[산단의 경계, 기업의 한계] 커지는 기업, 가로막힌 확장…대전산단 ‘규제의 벽’

사업을 확장하지도, 나가지도 못한다. 입주를 희망하는 기업 역시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지역 산업의 기반이 돼야 할 산업단지가 입주업종 제한 규제로 기업의 이동과 성장을 되레 제약하고 있다. 반세기 넘게 지역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해온 대전산업단지가 재생사업과 산업구조 변화가 맞물리면서 현행 규제가 기업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존 기업은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전·증설을 추진하지만 업종 제한 등에 막히고, 신규 기업은 입주를 희망해도 업종 제한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한다. 기존 기업과 신규 업체가 처한 상황은 달..

"횡단보도 하나 두고 탄방"… 둔산 14구역 `둔산동 편입` 움직임
"횡단보도 하나 두고 탄방"… 둔산 14구역 '둔산동 편입' 움직임

대전 노후계획도시정비 1차 선도지구로 선정된 둔산14구역(한가람·한양)에서 '둔산동' 편입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같은 생할권임에도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둔산동과 탄방동으로 나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에서다. 6일 서구청 등에 따르면 최근 국민신문고에 둔산14구역 한가람아파트와 한양아파트를 둔산동으로 변경해 달라는 민원을 접수됐다. 현재 둔산14구역은 행정구역상 탄방동에 속해 있다. 반면 14구역 인근에 위치한 13구역(크로바·목련아파트)은 둔산동이다. 두 구역이 인접해 있음에도 행정구역상 동이 나뉘어 있어 주민들 사이에서..

[르포] 트램 공사에 시민 불편 가중…경적·호루라기 뒤엉키고 민원 잇따라
[르포] 트램 공사에 시민 불편 가중…경적·호루라기 뒤엉키고 민원 잇따라

5일 오후 4시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12공구인 중구 서대전 지하차도 일대. 공사장 통제요원의 호루라기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통제요원들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했지만 공사로 좁아진 도로에 차량이 몰리면서 곳곳에서 경적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차량은 통행 안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듯 공사 구간 방향으로 잘못 진입했다. 이를 발견한 통제요원이 다급하게 호루라기를 불며 차량을 향해 뛰어갔다. 요원이 손짓으로 통행 방향을 다시 안내하고 나서야 차량은 방향을 틀어 빠져나갔다. 그 사이 뒤따르던 차량들도 속도를 줄이면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 갑천생태호수공원에 대형 꿈돌이·꿈순이 등장 대전 갑천생태호수공원에 대형 꿈돌이·꿈순이 등장

  •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네’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네’

  • ‘자전거 안전하게 탑시다’ ‘자전거 안전하게 탑시다’

  • 추석 앞두고 벌초 한창인 국립대전현충원 추석 앞두고 벌초 한창인 국립대전현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