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 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

  • 오피니언
  • 사이언스칼럼

[사이언스칼럼] 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

조재완 한국원자력연구원 경제성분석실 선임연구원

  • 승인 2025-07-03 16:39
  • 신문게재 2025-07-04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clip20250703093104
조재완 한국원자력연구원 경제성분석실 선임연구원
"재생에너지냐, 원자력이냐."

탈탄소를 위한 논쟁에서 우리는 종종 이 둘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한다. 마치 어느 쪽이 '더 나은' 미래인지를 놓고 경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전력 시스템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 발전원을 조합해 비중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정답이 하나는 아니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매우 좁은 것이 현실이다.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가장 흔한 오해는 "총량만 맞추면 된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전기는 총량이 아닌 순간의 균형으로 작동하는 에너지다. 사용자의 수요는 매 순간 바뀌고, 공급은 반드시 실시간으로 맞춰야 한다. 전력망은 매초 단위로 전국 수요와 공급을 동기화시키는 거대한 정밀 기계이며,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대규모 정전이나 계통 불안정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맞춰야 할 것은 '총량'이 아니라 '타이밍'이다.

전력 저장에 대한 기대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많은 이들이 휴대폰 배터리를 떠올리며 전기도 쉽게 저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약 0.02킬로와트시(kWh)의 휴대폰 배터리 저장 용량은 삶에서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전기차 가격이 여전히 내연기관차보다 비싼 이유는 80킬로와트시 규모의 배터리 가격이 차량가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높기 때문이다. 하물며 발전소의 전력을 저장하는 1만 킬로와트시 배터리를 전국에 설치하려면 얼마나 큰 비용이 들까? 2024년 기준 전국에 설치된 에너지저장장치(ESS) 용량은 200만 킬로와트시이다. 앞으로 차츰 늘려가야겠지만 거기에 기댈 수만은 없다.



전력 저장의 한계뿐 아니라, 전기를 전달하는 통로 또한 심각한 병목 현상을 겪고 있다. 발전은 주로 지방 곳곳에서 일어나지만, 수요는 수도권과 산업단지에 집중된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송전망이다. 어디에서 생산해서 어디에서 소비하는가, 그리고 가는 길은 충분히 넓은 가를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 송전망은 포화상태에 있다. 부족한 송전망을 증설하는 작업은 길게는 10년 넘게 지연되기도 한다. 송배전 용량 부족으로 이미 준공된 발전소를 돌리지 못하는 판국이다.

고속도로는 막히면 늦게라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전기는 아니다. 통행 가능한 범위를 넘으면 더 이상 고속도로 진입 자체를 막아 버린다. 들어가지 못한 전기는 대개 그냥 버려진다. 실제로 제주도에선 태양광과 풍력 발전량이 넘치는 날, 계통 연결이 제한되는 '출력 제한'이 2022년 132회, 2023년 181회 발생해 해마다 늘고 있다. 즉, 만들어 놓고도 쓰지 못하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어쩌면 에너지 믹스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보단 송전망 증설에 대한 논의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다행히 최근 전력망 특별법이 제정돼 송전망 증설이 가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단순히 '좋아 보이는 기술'을 선택할 순 없다. 에너지 정책은 4차원의 시공간 속에서 계획해야 한다. 하나를 넣으면 하나가 빠지는 단순 더하기?빼기 게임이 아니다. 발전원마다 다른 역할이 있기에 어느 하나를 줄이려면 이를 대체할 옵션이 있어야 한다. 24시간 안정적으로 가동되는 기저부하 전원과 함께 수요 변화에 따라 출력을 조절할 수 있는 부하추종형 전원도 필요하다. 발전원마다 기동 시간, 출력 조절 속도, 최소 운전 출력이 제각각이다. 결국, 에너지 정책은 표어가 아니라 제약 조건 속에서의 최적화 문제이며, 그 해답은 공학적 언어로 말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물리적 복잡성을 정치적 문제로 치환해왔다. 전문가들의 시뮬레이션과 과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정책적 제안들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 불합리하게 변경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기술적 정합성과 과학적 판단이 정치적 입김 앞에 밀린 것이다.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앞두고, 정책 결정이 과학보다 감성에 휘둘리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그 대가는 결국 국민이 지게 된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중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은, 전력망이 받아줄 수 없는 사치다. 탄소중립의 길은 감성의 구호가 아니라 과학의 설계로 완성된다. 조재완 한국원자력연구원 경제성분석실 선임연구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경쟁 입찰 조회수 부풀리기 의혹 제기도
  2. [대전다문화] 열대과일의 나라 태국에서 보내는 여름휴가 ? 두리안을 즐기기 전 알아야 할 주의사항
  3.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4. [대전다문화] 세계 일회용 비닐봉투 없는 날
  5. [대전다문화] 7월 17일 '제헌절', 대한민국 헌법이 태어난 날입니다
  1. 한국영상대 학생들, 웹툰·웹소설 마케팅 현장에 뛰어들다
  2. 중·고등학생 수행평가 2학기부턴 진짜 학교에서만 "본래 목적 집중"
  3. [대전다문화] 대전시 가족센터·다문화가족지원센터 7월 프로그램 안내
  4. 의정활동 체험 ‘재미있어요’
  5. 더 길어진 여름에…지난해 열대야 발생일수 역대 1위

헤드라인 뉴스


이재명 대통령, 4일 취임 후 첫 대전 방문 ‘타운홀미팅’

이재명 대통령, 4일 취임 후 첫 대전 방문 ‘타운홀미팅’

이재명 대통령이 4일 취임 후 처음으로 대전을 방문한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대전 유성구 도룡동 대전컨벤션센터에서 ‘국민소통 행보 2탄, 충청의 마음을 듣다’를 주제로 타운홀 미팅 시간을 갖는다. 국민의 현장 목소리를 듣고 자유롭게 토론과 질문을 하는 자리로,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비롯해 과학기술인 등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미팅은 사전에 참석자를 선정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전날인 3일 오후 2시 대통령실 홈페이지를 통해 행사 일정을 공개하고 행사 당일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300여 명을 참석시킨..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41. 대전 서구 가장동 돼지고기 구이·찜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41. 대전 서구 가장동 돼지고기 구이·찜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트로트 신동 김태웅, 대전의 자랑으로 떠오르다
트로트 신동 김태웅, 대전의 자랑으로 떠오르다

요즘 대전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초등생이 있다. 청아하고 구성진 트로트 메들리로 대중의 귀를 사로잡고 있는 대전의 트로트 신동 김태웅(10·대전 석교초 4) 군이다. 김 군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건 2년 전 'KBS 전국노래자랑 대전 동구 편'에 출연하면서부터다. 당시 김 군은 '님이어'라는 노래로 인기상을 받으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중파 TV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김 군은 이후 케이블 예능 프로 '신동 가요제'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김 군은 이 무대에서 '엄마꽃'이라는 노래를 애절하게 불러 패..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취약계층을 위한 정성 가득 삼계탕 취약계층을 위한 정성 가득 삼계탕

  • 대통령 기자회견 시청하는 상인들 대통령 기자회견 시청하는 상인들

  • 의정활동 체험 ‘재미있어요’ 의정활동 체험 ‘재미있어요’

  • 도심 열기 식히는 살수차 도심 열기 식히는 살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