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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가 최승희/사진=연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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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미국과 유럽 남미를 한류로 물들인 한 여인이 있었다.
동양 여성으로서는 170cm 제법 큰 키에 검은 머리 단발, 그리고 속이 훤히 비치는 복장을 하고 파격적인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서양인들에게 신비로웠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게리 쿠퍼, 로버트 테일러 등 예술가, 영화배우들이 그녀의 공연을 관람했고 그녀의 매력에 홀렸다. 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는 그녀를 위해 할리우드 영화 출연을 연결해주려 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무산됐다.
‘동양의 진주’, ‘동양의 이사도라 덩컨’, ‘전설의 무희’라고 불렸던 이 여인은 최승희였다.
1911년 11월 24일 가난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자식들의 교육에서만은 개방적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숙명고등여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소학교시절에는 전교 1등에 월반을 2번이나 하며 동기들보다 일찍 졸업했지만, 가세는 기울어지고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어려워지자 일본 현대무용의 개척자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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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추는 여자' 책에 수록된 야외무용하는 최승희. 1995.8.4/사진=연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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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했으며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명성을 얻자 한국으로 돌아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고국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허연 맨살을 드러내면서 기생들이나 추는 춤을 추는 여자를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1932년 일본에서의 첫 단독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언론과 평론가들은 극찬했고 관객들도 넘쳐났다. 게다가 남편 안막의 수완으로 여운형, 마해송 등 거물급이 주축이 돼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졌다. 193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 공연을 하며 이름도 없었던 ‘코리아’를 알리며, 한류를 전파하기도 했다.
독하게 자신의 꿈을 이뤄갔던 최승희도 격랑의 시대에서 살아남기는 녹록지 않았다.
일제시대에 군 위문공연과 국방헌금 헌납에 광복 이후 친일파 논란에 반민특위 친일 명단에 이름이 오르자 남편 안막을 따라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의 후원 아래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우며 승승장구했지만, 19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당하면서 그녀의 이름도 서서히 역사 속에서 잊혔다.
그리고 북한은 2003년이 돼서야 1969년 8월 8일 최승희가 세상을 떠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친일파, 월북 무용가라는 정치적 수식어는 천재 무용가 최승희에게는 뼈아픈 개인사였다. 그러나 전국의 춤꾼과 권번 기생들까지 찾아다니며 자신의 춤 세계를 구축했고, 이름도 생소한 세계 각지를 돌며 오롯이 한국의 춤으로 그들을 홀렸던 그녀의 열정적 춤사위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역사였다./김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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