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충남대 교수) |
삼백육십오 일의 여정을 마치는 길목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크고 작은 길목은 골목길로 이어져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그 골목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만나고 헤어지며 울고 웃었을까. 시인 이상은 막다른 골목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고, 세상을 떠난 가수의 '골목길'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창을 바라보며 느낀 설렘과 후회의 감정이 애절하게 스며 있다. 뮤직비디오 '소격동'은 소녀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추억이 깃든 눈 내리는 골목길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이렇게 골목은 사랑과 설렘, 후회와 회상 등 우리가 살아가며 겪은 감정을 오롯하게 간직하고 있다.
확 트인 도로가 제공하는 선명한 편리성은 우리 삶에 대부분 필요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때로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 말고, 잠시 숨거나 쉬고 싶은 모퉁이 골목이 필요하다. 어릴 적 동네 골목의 숨바꼭질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을 받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성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꼭 걷고 싶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둘레길과 올레길에 힐링 혹은 치유라는 말이 결합된 것을 보아도 도시 속 골목길은 지친 우리에게 쉼터가 되곤 한다.
이런 둘레길과 올레길은 떠나야 닿을 수 있는 곳이고 특별한 경우에 가는 곳이 되어가면서 어느새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특정한 여행지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골목길은 우리 가까운 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 골목은 우리 이웃들이 지나다니며 만들어진 자연의 일부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지역의 삶과 문화를 닮아 형성된 장소이다. 서울의 북촌이나 서촌, 경리단길의 골목길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우리 지역인 대동에도 옛 골목길이 예쁘게 재조성되어 있다. 벽화가 그려져 있고 작은 골목길에 화분도 놓여 있다.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이 향수와 안정감을 자아낸다. 원도심의 길목이나 가까운 골목길이 자주 찾아가고 싶은 곳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과 우리 사회는 한결 평화로워질 것이다.
골목길은 개발과 도시 성장의 이면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나의 고향 마을에는 노성천이 있다. 갈대와 노을이 어우러진 그 곡선의 둑길을 참 좋아했는데, 돌을 쌓고 모래 공사를 한 후에는 잘 안 가게 된다. 은행동 대전아트시네마 앞에 가로수들이 잘려 밑둥만 남겨진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까웠던 때가 작년 이맘쯤이다. 도시 재개발이나 지역 정화 사업 등을 추진하다 보면 골목길의 자취가 사라지고 직선으로 변해가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이런 골목길에는 달동네, 쪽방촌, 판자촌, 저개발 지역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이 있다. 골목길을 재생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통도 함께 아우를 때 더 의미가 있다. 삶의 흔적과 역사적인 자취, 그리고 옛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룬 골목길을 기대해 본다.
영화 '길La Strada'의 잠파노와 젤소미나의 서커스 유랑이 보여주듯 길목은 인생에 대한 은유이며 이야기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중요한 통로와 어귀를 잘 살피는 것은 우리 삶을 더 따듯하고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그 통로는 이웃들과 연결되는 마음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겨울의 길목에서 최선을 다한 우리가 함께 따듯한 격려를 나누며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도 한 해를 멋지게 보내는 방법일 듯싶다. 발길이 닿는 그곳에 온기가 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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