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두장군 전봉준 |
조선말기인 1855년 (철종임금6년)에 전라북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현재는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에서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라는 직책을 지낸 전창혁(全彰爀)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전창혁은 이름을 승록(承?)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귀한 아들이 태어나자 "밝고 맑게" 살라고 이름을 "밝을 명(明)"자와 "맑을 숙"자를 써서 "명숙(明淑)" 이라고 지어 불렀다.
태어난 지역이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번지 라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명숙을 낳은 아버지인 전창혁은 당시의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며 백성을 못살게 핍박하자 이에 저항하여 농민 몇 명과 고부군청에 쳐들어갔다가 붙잡혀서 모진 곤장을 맞고 죽 기직전에 풀려났으나 한 달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어릴 때 아버지가 군청에 잡혀가서 곤장에 맞아죽은 이 사건은 전봉준이 훗날 동학농민운동을 전개하여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은 정신적인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밝게 살고, 맑게 깨끗하게 살라고 아버지가 지어준 "명숙(明淑)" 이란 이름보다도 "녹두장군" 이라고 많이 불러지게 된 것은 워낙 체구가 작고 왜소한데 생각이나 행동은 야무지고 똘똘하여 녹두콩알에 비유하여 "녹두장군"이라고 많이 불러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곤장을 맞아 죽게 되자 집안은 기울어지니 약초를 캐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가지 방술을 배우기도 하면서 떠돌다가 한때는 다섯 식구의 가장으로 농사를 지으며 동네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크게 발전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도 못하다" 는 말을 자주하며 마음 깊은 곳에 큰 꿈이 있었다.
1890년 35세 무렵에 이름을 명숙(明淑)에서 봉준(琫準)으로 바꾸고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문하에 들어가 동학의 접주가 되었다. 동학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전봉준이 스스로 말하기를 "동학은 하늘을 공경하고 본마음을 지키는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를 바탕으로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함이라 하였다.
전봉준은 동학(東學)을 바른 사회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 서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서 농민 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민운동이 농민봉기로 일어났던 원인 제공은 고부군수 조병갑이었으니 조병갑은 당시의 영의정 벼슬을 지내던 조두순(趙斗淳)의 조카로, 뒤를 봐주는 영의정을 믿고 세금은 규칙의 세배로 징수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며 포악한 정치를 펼쳐서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1893년 12월에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우두머리로 삼아 고부군 관아를 찾아가서 바른 정치를 해줄 것을 진정하였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았으며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전봉준은 다시 뜻있는 농민들을 모으고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돌리면서 거사를 맹약하고 다음해인 1894년 2월15일에 동학농민군 천여 명을 이끌고 고부군 관아를 습격하여 지키던 관리를 살해하고 식량과 병기를 약탈하며 고부 군을 점령하였다.
고부민란을 일으킨 동학농민군에게 고부군 관아가 점령당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가고 동학농민군은 고부군의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을 하고, 창고에 쌓여있던 세곡을 꺼내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부정부패한 관리 조병갑을 비롯하여 무능한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새로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보내어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모든 잘못과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리고 동학교도를 색출하여 체포, 감금하고 살해를 일삼으며 만행을 일삼자 1894년 3월 하순에 전국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보국안민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전봉준은 백산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이 일만 명을 넘으며 여기에서 전봉준을 동학농민군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하였다.
동도대장 전봉준 은 손화중 김개남을 총 관령으로 삼아서 보좌하게 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통문을 돌리고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총 궐기할 것을 요청하니 농민 민란은 이제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1894년 4월 4일에는 동학농민군이 전라북도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점령하고, 이어서 전라북도 정읍을 점령하고 흥덕 과 고창읍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확장해 나갔다.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며 4월 12일부터 4월 17일까지 닷새사이에도 전라도 영광지역과 함평지역과 무안일대를 진격하여 점령하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고 장성지역을 점령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여 인천에 청나라군대가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핑계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전봉준휘하의 남접 동학농민군 10만 여명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을 다르던 손병희 가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 10만 여명이 합세하여 논산에 모여들었다.
이때 지원군으로 들어온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국면으로 전개되고 전봉준은 자신의 주력부대 일만 여명과 공주지역을 공격하다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정읍지역으로 피신했다가 전라남도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전봉준은 일본군에게 12월 2일 체포되었다. 일본공사가 전봉준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일본에 충성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를 거듭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며 "나 하나를 위해 살아온 내가 아니다" 하며 "나라를 위한 붉은 충성 누가 아리오." 하고 탄식하며 교수형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일반 서민 농민들 중에는 하늘을 공경하며 바른 마음을 지키고 모두 평등하게 사람답게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작은 거인 "녹두장군"을 그리워하며 노래가사를 지어 부르니 입에서 입으로 방방곡곡 울려 퍼져나갔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필자가 어릴 때에도 동네 할머니들에게서 많이 듣던 노랫말이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 |
![]()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