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 칼럼 ⑩] 말과 글의 한계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염홍철 칼럼 ⑩] 말과 글의 한계

염홍철 한밭대 명예총장

  • 승인 2023-03-09 15:25
  • 수정 2023-03-15 15:15
  • 신문게재 2023-03-10 18면
  • 현옥란 기자현옥란 기자
염홍철칼럼
염홍철 한밭대 명예총장
엘리 위젤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증언과 고백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물론 자신도 그때 10대의 어린 나이로 참극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지요. 그 후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사회 활동가로 활약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그를 '세계의 양심'이라고 칭송한 바 있지요.

위젤은 자신이 생각하는 평생의 사명은 '교사'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며, 죽을 때까지 가르치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수시로 얘기했다지요.



위젤은 교육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보스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당시 그의 제자이며 조교였던 아이엘 버거는 위젤 교수의 강의와 학생들과의 토론을 모아 그의 사후 책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은 고통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초월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이지요. 그중에서 오늘은 위젤이 주장하는 '말과 글의 한계'에 대해서만 좁혀서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위젤 교수는 강의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예고도 없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위젤 교수는 굵지만 섬세한 목소리를 내는 바리톤에 가까운 음색이었고, 눈을 감고 박자에 따라 몸을 흔들기도 했지요. 그의 양손은 마치 합창단을 지휘하듯 부드럽게 위아래로 움직였습니다. 조교인 아이엘 버거는 왜 강의 시간에 갑자기 노래를 부르셨나 궁금하게 생각해서 강의가 끝나자 위젤 교수를 찾아가 "오늘 노래는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만,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요?"라고 물어봤지요.



위젤 교수는 차분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말과 글을 넘어선 무언가에 감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겠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정보를 서로 나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무언가가 더 추가되어야 하지요. 서로 토론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지요. 그렇지만 무언가 하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락이나 곡조가 빠진 것 같아서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했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강의실에서 위젤 교수가 노래를 부른 순간부터, 닫혀있던 문이 열린 것 같이, 강의 시간에 토론이 더 활기가 넘쳤고 학생들은 더 자주 손을 들고 얘기를 많이 했으며, 진지한 질문도 오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개인적으로 해석하기에는 감정에 섞여 몸짓까지 해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평소 근엄했던 교수와 다른 인간적인 모습에 친근감을 느꼈고 그것이 강의 분위기에 영향을 줬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무거운 강의 속에 뭔가 답답함을 느꼈는데, 노래를 통해 다소 해소되어 새로운 호기심으로 이동해서일까요?

위젤 교수는 프랑스 소설가 플로베르라는 작가의 "오전 내내 고심하다 마침내 쉼표 하나를 찍고 있다. 그리고 오후 내내 고심하다 그 쉼표를 지웠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와 똑같이 자신도 900쪽 분량의 원고를 썼는데, 자신도 원고를 다시 줄이고 다듬는 작업을 하면서 "그렇게 깎아내고 지워버린 말과 단어는 그 자리에 남게 됩니다"라고 다소 아리송한 말을 했습니다.

단어를 지워버렸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 남는다는 말인가요? 이런 의문에 대해 위젤 교수는 "마치 죽은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렇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의도나 목적이 필요합니다."

이제야 우리는 위젤 교수의 의도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말과 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침묵'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언어란 기본적으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요. 단어와 단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빈 곳도 어쩌면 언어의 일종이 아닐까요?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최대 30만 원 환급' 상생페이백, 아직 신청 안 하셨어요?
  2. 화성시, 거점도시 도약 ‘2040년 도시기본계획’ 최종 승인
  3. 갑천에서 18홀 파크골프장 무단조성 물의… 대전시, 체육단체장 경찰 고발
  4. 애터미 '사랑의 김장 나눔'… "3300kg에 정성 듬뿍 담았어요"
  5. 대전 불꽃쇼 기간 도로 통제 안내
  1. "르네상스 완성도 높인다"… 대전 동구, '주요업무계획 보고회'
  2. 코레일, 겨울철 한파.폭설 대비 안전대책 본격 가동
  3. 대출에 짓눌린 대전 자영업계…폐업률 7대 광역시 중 두번째
  4. 대전권 14개 대학 '늘봄학교' 강사 육성 지원한다
  5. '대덕특구 사이언스센터' 딥테크 혁신성장 허브로 자리매김

헤드라인 뉴스


국내기업 10곳 중 7곳 이상 "처벌·제재로는 중대재해 못줄여"

국내기업 10곳 중 7곳 이상 "처벌·제재로는 중대재해 못줄여"

국내 기업 10곳 중 7곳 이상이 정부의 노동 안전대책에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조사됐다. 처벌과 제재 중심의 정책으로는 중대재해 예방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국내 기업 262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새 정부 노동안전 종합대책에 대한 기업 인식도 조사' 결과를 25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 9월 발표된 노동안전 종합대책과 관련해 기업들의 인식과 애로를 파악하기 위해 진행됐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동안전 종합대책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응답한 기업 중 73%(222곳)가 정부 대책이 '중대재해 예방에..

충청권 국회의원 전원, ‘2027 충청U대회 성공법’ 공동 발의
충청권 국회의원 전원, ‘2027 충청U대회 성공법’ 공동 발의

충청권 여야 국회의원 27명 전원이 ‘2027 충청 유니버시아드대회’(U대회) 성공 개최를 위한 국제경기대회 지원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수현(충남 공주·부여·청양)·국민의힘 이종배(충북 충주) 의원은 25일 국제경기대회 조직위원회가 대회 운영에 필요한 기부금품을 직접 접수·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국제경기대회 지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공동으로 대표 발의했다고 밝혔다. 현행 제도에서는 조직위원회가 기부금품을 접수할 때 절차가 복잡해 국민의 자발적인 기부 참여가 제한되고, 국제경기대회 재정 운영에 있어 유연성이 낮다..

국내 최대 돼지 사육지 충남서 ASF 첫 발생… 도, 긴급 차단방역
국내 최대 돼지 사육지 충남서 ASF 첫 발생… 도, 긴급 차단방역

국내 최대 돼지 사육지역인 충남에서 치사율 100%(급성형)에 달하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처음으로 발생했다. 충남도는 ASF 확산을 막기 위해 도내 양돈농가 등에 상황을 전파하고, 이동 제한 등 긴급 차단 방역에 돌입했다. 25일 도에 따르면, 총 463두의 돼지를 사육 중인 당진시 송산 돼지농가에서는 지난 17∼18일 2마리가 폐사하고, 23∼24일 4마리가 폐사했다. 농장주는 수의사의 권고를 받아 폐사축에 대한 검사를 도에 의뢰했다. 도 동물위생시험소는 폐사축에 대한 ASF검사를 진행, 이날 오전8시 양성 판정을 내렸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가을비와 바람에 떨어진 낙엽 가을비와 바람에 떨어진 낙엽

  • 대전시의회 방문한 호치민시 인민회의 대표단 대전시의회 방문한 호치민시 인민회의 대표단

  • 대전시청에 뜬 무인파괴방수차와 험지펌프차 대전시청에 뜬 무인파괴방수차와 험지펌프차

  • 주렁주렁 ‘감 따기’ 주렁주렁 ‘감 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