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할아버지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할아버지

김지윤 정치행정부 기자

  • 승인 2024-08-26 08:45
  • 신문게재 2024-08-26 18면
  • 김지윤 기자김지윤 기자
쥬니
김지윤 기자.
내 할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다.

아빠와 그의 형제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업적에 자부심을 느낀다. 해병대 2기 출신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할아버지를 이따금 "우리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지, 참 대단하신 분이었어"라며 돌아가신 그를 떠올리며 술잔을 비우곤 한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자신이 참전 용사라는 사실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에야 아빠를 포함한 모든 자식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고 넉넉하게 살아가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그리 좋은 형편은 아니었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갈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그런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하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형제는 부모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살림밑천을 자처했지만, 달가워하시지 않았다.

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동네를 돌며 폐지를 줍고 다니셨다. 이것 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는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후가 되면 학원 청소 등 다른 일거리도 찾아 나섰다.

간혹 일을 나가기 전 할아버지는 현관문 한곳을 멍하니 응시하시곤 했다. 현관문 오른편에 붙여 있던 손바닥만 한 명패였다. 명패는 '6·25 참전 용사가 사는 집'이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작은 명패가 참 자랑스러웠지만, 할아버진 "사는 게 팍팍한데, 이게 뭐 대수라고"라며 슬픈 얼굴을 보였다.

앞서 말했듯 할아버지는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그리 달가워 하지 않았다.

TV 속에서는 자신들을 '영웅'으로 소개하지만, 할아버지와 그의 전우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수중에 들어오는 돈 몇푼이 더 소중했다.

전쟁 당시도 끔찍했던 것 같다. 아주 드물게 근처 동네에 사는 전우들과 약주를 하고 돌아오신 날이면 그 당시를 회상하며 힘들어했다.

아끼던 손녀인 나는 직장인이 되고, 용돈을 드릴 형편이 됐지만 이를 받을 조부모님은 계시지 않는다.

아빠와 형제들 역시 술자리마다 자신의 부모를 자랑하는 건 나와 같은 죄송함과 보고 싶은 간절함일 것이다.

오랜만에 하늘에 계실 조부모님을 떠올렸다.

최근 SNS에서 젊은 청년이 지팡이를 든 채 앉아 계신 참전용사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는 영상을 보고서다.

아마 영상을 본 사람들 역시 화면 속 청년과 같이 참전 용사들에게 '존경, 감사'외에 '죄송함'이라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 대부분이 어떤 현실을 사는지 잘 아니까.

내가 어릴 적 "나는 그래도 살만하지, 근데 밥도 겨우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아. 명패만 주면 뭐하냐고 명패만..."이라며 하소연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와 다를 게 없는 지금에 할아버지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워 교회에서 얻어온 빵 한 조각을 나눠 드시고, 무료 급식소 일정을 외우고 다니시는 전우들을 보면 말이다.

영웅으로 추대받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한 상황을 견뎌야 하는 할아버지들의 현실은 언제쯤 나아질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교육공무직 파업에 공립유치원 현장도 업무공백 어려움
  2. 인도 위 위협받는 보행자… 충남 보행자 안전대책 '미흡'
  3. [인터뷰]"지역사회 상처 보듬은 대전성모병원, 건강한 영향력을 온누리에"
  4. [춘하추동]한 해를 보내며
  5. 충남경제진흥원, 부패방지경영시스템 인증 획득
  1. '족보, 세계유산으로서의 첫 걸음'
  2. 충남교육청 2025 학교체육 활성화 유공자 시상식 개최
  3. 충남도 '2025 대한민국 지방재정대상' 국무총리상 수상
  4. 충남도, 도비도·난지도 개발 위한 행정 지원체계 본격 가동
  5. 고속도로서 택시기사 폭행 KAIST교수, 항소심서 벌금형

헤드라인 뉴스


李대통령 대전충남 與의원 19일 만난다…통합 로드맵 나오나

李대통령 대전충남 與의원 19일 만난다…통합 로드맵 나오나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대전 충남 의원들이 18일 전격 회동, 두 시도 통합을 위한 로드맵이 나올지 관심이 쏠린다.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서 국가균형발전과 수도권 일극체제 극복을 위한 맞춤형 처방전으로 대전 충남 통합을 애드벌룬 띄우는 것이다. 그동안 국민의힘 주도로 이 사안을 주도해 왔다면 이제는 정부 여당 까지 논의가 확장하는 것인 내년 지방선거 전 통합을 위한 초당적 합의가 이뤄질 지 주목된다. 17일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1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더불어민주당 대전·충남 국회의원들과 오찬 회동을 갖는다...

대전에 고성능 AI GPU 거점센터 구축... 글로벌 AX 혁신도시 거듭
대전에 고성능 AI GPU 거점센터 구축... 글로벌 AX 혁신도시 거듭

대전이 고성능 AI GPU 거점센터 구축을 통해 '글로벌 AX(인공지능 전환) 혁신도시'로 거듭난다. 대전시와 한남대,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 ㈜KT, 비케이비에너지(주), ㈜엠아르오디펜스는 17일 '한남대 AX 클러스터 및 고성능 AI GPU 거점센터'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전 세계적으로 AI 기술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GPU 거점센터 구축을 통해 연구기관과 AI 전문기업을 지원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거점센터는 한남대 캠퍼스 부지 7457㎡ 규모에 2028년까지 건립될 예정이다. 이날 협약식에..

④ 대전 웹툰 클러스터 `왜 지금, 왜 대전인가?`
④ 대전 웹툰 클러스터 '왜 지금, 왜 대전인가?'

대전시는 오랜 기간 문화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국립 시설 공백 속에서 '문화의 변방'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선 8기 이장우 호(號)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형 시설과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확충 사업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장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민선 8기 종착점을 6개월 앞두고 문화분야 현안 사업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전시가 내세운 '일류 문화도시' 목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보다는 향후 운영 구조와 사업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중도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성금으로 잇는 희망…유성구 주민들 ‘순회모금’ 동참 성금으로 잇는 희망…유성구 주민들 ‘순회모금’ 동참

  • 시니어 모델들의 우아한 워킹 시니어 모델들의 우아한 워킹

  • 딸기의 계절 딸기의 계절

  • 보관시한 끝난 문서 파쇄 보관시한 끝난 문서 파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