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효준 기자 |
흔히 가을은 수확의 계절로 표현한다. 따뜻한 봄에 씨앗을 뿌려, 여름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군 노동의 가치를 결실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가을에 충분히 수확을 해둬야 춥고 배고픈 겨울을 버틸 수 있는 만큼, 가을은 대한민국에서 정말 중요한 계절이다.
그런데 올해 우리에게 가을은 없었다. 명확히 표현하자면 수확의 기쁨을 누려보기도 전에 처참히 짓밟혀 겨울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비상계엄', 한밤중 갑자기 등장한 이 단어는 국내 경제를 제대로 난도질하려는 모양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바로 국내 증시다.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던 국내 증시는 유례없는 소식에 곧바로 아래로 고꾸라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해제 사건 이후 4거래일 동안 국내 주식시장은 연저점을 갱신(12월 9일 기준)했고, 시가총액만 총 144조 원가량이 증발했다.
증발한 액수만큼, 대한민국 기업을 믿었던 국내 투자자들은 처절하게 배신당했다. 하루아침에 박살이 난 계좌를 받아든 개미들은 또다시 '국장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조롱을 받는 처지가 됐다. 그저 자국 기업의 가능성을 믿고 힘을 보탰을 뿐인데 그 대가가 너무 크다. 나스닥과 비트코인의 가파른 상승세를 바라보며 박탈감과 후회만 생길 따름이다.
결국 국내의 자금은 해외로 향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서학개미'(해외주식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보유 규모는 지난 6일 1121억 4039만 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찍었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16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국내에 투자돼 미래 잠재력을 키우는 데 쓰여야 했을 자금이 해외 주식과 채권 시장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과도한 공포에 신규 상장을 준비하던 지역 기업들도 상장예비심사를 통과하고서도 계획을 다시 철회하는 분위기다. 코스피·코스닥 지수와 공모주 시장이 전체적으로 얼어붙은 상태에서는 도저히 회사의 가치를 적절히 평가받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기업들이 스스로 의지를 꺾는다는 건, 절대 우리에게도 희소식이 될 수 없다.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올 한 해 지독하게도 국내 증시를 괴롭힌 이 차가운 단어가 현재로선 꽤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을을 잡아먹고 기세를 키운 겨울이 내년 봄까지 위협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길 것만 같다.
/심효준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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