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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윤 대전대 명예교수 건축가 |
역사 속 현실의 시간으로 가보자. 어느 날, 그 감옥의 벽 너머로 한 줄기 희망처럼 젊은 기자가 다가왔다. 바로 영국 웨일스 출신의 가레스 존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국가, 모스크바 공국으로 시작한 소련의 진실을 직접 보고자 했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의 모티브로도 손색이 없을 다양한 모양의 첨탑을 가진 그가 상상한 도시 모스크바는 비잔틴제국의 영화를 재현한 화려함의 이상도시였다. 그러나 눈으로 본 모스크바는 공포의 디스토피아가 되어 있는 절망적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또 보았다. 벽 안에 갇힌 사람들, 굶주림과 침묵, 그리고 소리 없는 아우성과 인간의 죽음을. 후일 역사는 이를 홀로도모르(아사)로 또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표현하는 대 흉사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이상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했고 오히려 천만 명이 넘게 죽임을 당한 현장 이었다. 가레스 존스는 진실을 봤지만 그것을 전할 언어와 무대는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기근이 심했다지만 스탈린의 '사회주의 근대화'란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수난을 당했고, 존스 역시 취재하는 길에서 죽다 살아 겨우 이를 세상에 알린다. 이후 존스는 취재 중 중국 만주에서 괴한에게 살해 당한다.
갈망한 모두 그 성이 아름답다고 믿고 싶어 했다. 꿈꿨던 유토피아의 이상을, 감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과가 어떻든 진실을 말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이고 듣는 것은 우리의 권리다' 라고 말한 사람, 유토피아를 그리도 꿈꾸었던 영국의 조지 오웰은 이 경고를 들었다. 그리고 깊은 물음을 품었다. '왜, 이상은 항상 배신당하는가?' 라고 '동물농장'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공평한 사회를 위해 들고 일어났던 동물들이, 어느새 스스로를 억압하는 권력의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평등은 구호가 되고, 나눔은 통제의 수단이 되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유명한 이 구호는 그럴싸했지만 이내 그 평등의 희망은 압재로 바뀌었고, 이상은 슬픈 웃음거리가 된다.
'1984'로 '초국가 재편'을 예시한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도 이상도시의 염원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가레스 존스의 현실 폭로로 같은 배를 탄다. 그는 마치 화가 윌리엄 터너가 '난파선'을 그리기 위해 실제 배에 묶여 폭풍을 체험하듯 스페인 전쟁의 내전에도 참전한다. 누구와 죽을 둥 살 둥 싸우는 것인지? 그의 소설 '카탈루냐 찬가'는 바로 그가 체험한 공산사회의 전체주의적 이면을 본 충격으로 태어났다. 아직도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같이 이 둘은 이념에 갈등하는 이들의 옥신거리는 주제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주제의 다툼보다 훨씬 아프고 쓰라린 상처를 낸다.
오늘도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누군가는 평등한 세상을 외치고, 새로운 변화를 부르며 반대편에선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평화를 외친다.
오웰의 '동물농장' 은 조용히 경고한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이상은 쉽게 노래가 되고, 권력은 쉽게 족쇄가 된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이상도시도 맹목적으로 믿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기록도 감시의 대상이 된다. 희망은 필요하나, 그 희망을 지키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살피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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