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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전 계룡용남고등학교장 |
대략 5~60년 전쯤 이야기다. 초려(草廬) 이유태 선생(1607∼1684) 묘소의 행정구역은 과거 연기군이었다. 오늘날은 세종특별자치시로 바뀌어 초려역사공원(草廬歷史公園)으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묘지 주변의 소나무 도벌도 횡행하였다.
초려 선생의 재실인 외딴집을 관리하던 사람은 체념하고 있었다. 묘소는 이웃 동리 사람들에게 소와 염소들의 가축 방목 장소가 되어서 묘역은 물론 묘지의 봉분까지도 빨갛게 드러나 있었다. 가축들의 분뇨로 온갖 벌레들이 윙윙대며 득실거렸다. 도산재(道山齋) 재실은 잡초로 가득했고, 위토(位土)의 전답에서도 적절한 소출을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점이 문중에서는 큰 근심거리였다. 수차 협의를 거친 후에 강헌(剛軒) 이종순(1931∼2000)을 보내서 해결해 보고자 하였다. 1965년 강헌의 35세 때였다.
이사한 강헌은 어린 자녀들에게 하교 후 가축을 방목하지 못하게 지키도록 시켰고 손수 낮에는 전답에서 땀을 흘렸으며 밤에는 산판에 있는 나무들을 몰래 벌목해 가지 못하도록 지켰다.
당연히 이웃 동네 사람들의 저항은 대단하였다. 지난날 대대로 해 왔던 일인데 왜 못하게 막느냐는 것이었다. 술을 마시고 와서 행패를 부렸다. 심한 사람들은 낫과 괭이를 가지고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타리를 찍어가며 협박하기도 하였다.
강헌이 고향 공주의 선조 제사에 참석하고자 자리를 비운 날 밤에는 더 시끄러웠다. 외딴집의 사립문 주위는 소란스러웠고 부인과 자녀들은 무서움에 벌벌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부인은 마음의 병을 얻었고 이는 육신의 병으로 옮겨졌으며 급기야는 53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원인이 되었다.
이 어려운 점을 해결한 것은 강헌의 한문 가르침이었다. 강헌은 이사한 그해 겨울부터 매해 겨울 농한기면 마을의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무보수로 한문을 가르쳤다. 외딴집 재실에서 천자문, 계몽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목이 쉬도록 일대 일로 지도하였다. 몇 해 후에는 바로 옆에 새로 집을 지어 합류한 막내아우인 병주(屛 洲) 선생과 더불어 더욱 적극적인 지도에 나섰다. 학생들이 많을 때는 50명 가까이 되었다. 먼 동네에서도 글을 배우고자 몰려들었다. 강헌·병주 선생 형제에게는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일념으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내치지 않고 즐겁게 받아들였다.
변화는 서서히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의 사회 풍속은 순화되어 갔다. 학생들은 효도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문 지도를 해주는 강헌 형제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냈다. 점점 해악이 되는 일을 일절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말투와 행동은 공손해졌고 강헌 형제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스승으로 대하게 되었다. 마을의 풍속이 자연스럽게 선해져서 예절과 질서를 지키는 문화가 조성된 것이다. 형제들의 노력이 한 마을의 공동체를 선한 이상사회로 만든 것이다. 이에는 물론 한문에 담긴 내용이 오늘날의 지식 위주 교육이 아니라 선한 인성을 함양하는 내용이었음에 기인한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세종시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 그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초려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올해 10년째 1주일에 10강좌 시민을 위한 인문학 특별문화강좌를 운영하고 있어 너무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마 강헌 선생도 오늘날의 초려 선생 묘역을 하늘에서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이석우 전 계룡용남고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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