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아버지의 등에 깃든 인생의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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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보기]아버지의 등에 깃든 인생의 나침반

장연헌 변호사

  • 승인 2025-09-18 17:05
  • 신문게재 2025-09-19 19면
  • 이상문 기자이상문 기자
정연헌-변호사
장연헌 변호사
아버지의 13주기가 지난주였습니다. 살아계셨다면 95세가 되셨을 아버지가 가끔씩, 특히 요즘처럼 힘들 때에는 더욱 보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막내아들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서른셋에 결혼해 서른여섯에 첫아들을 얻었을 때, 저는 아들이 어찌나 예뻤는지 매일 안아주고 뽀뽀를 해 주었습니다. 어른들이 보시기에는 참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문득 저의 아버지도 저를 이렇게 이뻐 하셨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거나 칭찬받았던 기억은 없지만, 아들을 좋아하는 저를 보며 '우리 아버지도 나를 이렇게 이뻐해 주셨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 한번 여쭈어 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은 매우 희미합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때 목수 일을 나가시던 아버지께서 반짐발이 자전거에 저를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주신 일입니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와 쌀쌀한 날씨에 이른 아침 학교에 도착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외지에 나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오신 아버지께 큰절을 해야 했고, 중학교 때까지 일요일이나 방학이면 아버지와 함께 논밭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아버지와 작은 과수원 원두막에서 잠을 자고, 겨울방학이면 징검다리 개울을 건너 논뚝길을 지나 앞 마을 서당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방위병 시절 늦가을 달 밝은 밤이면 목수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와 콩밭에서 콩을 꺾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같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봄부터 초가을까지 소를 끌고 나가 냇가에서 풀을 뜯기는 일은 더욱 그랬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태권동자 마루치'라는 재미난 라디오 연속극을 들을 때, 저는 소의 배만 보며 '언제 배가 부를까'하고 원망했습니다. 소는 위를 4개나 가진 되새김질 동물이라 오른쪽 배가 잘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채 물도 먹여가며 하염없이 소의 오른쪽 배도 왼쪽 배처럼 부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돼지 파동이 날 때면 돼지 도르리를 하는 마을에서 돼지고기를 사오셔서 온 가족이 푸짐하게 먹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고시공부를 하고, 결혼한 후에도 집에 가면 아버지는 제가 할 농사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75세가 지나고부터는 더 이상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혼자 논밭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기력이 약해져서 아들에게 일을 시킬 힘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그때 선뜻 아버지를 따라 나서지 못했던 것이 너무 죄송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내키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제 인생에 피와 살이 되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서당에서 '계몽편'과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논밭에서 힘든 시간을 견디며 일했던 경험이 쌓여 지금의 제가 크게 모나지 않고 남들보다 뒤

처지지 않는 삶을 살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저도 아버지께 배운 대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들에게 절을 시키고, 해외 파견시절에는 함께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과 '계몽편'과 '명심보감'을 공부했으며, 집안일도 시켰습니다. 아이들은 다행히 크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처럼 카리스마가 없는 저를 잘 따라준 아이들이 고맙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대화 없이 행동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 인생에 스며들고, 기억에 남는 목가적인 장면들을 남겨 주셨고, 말보다 행동으로, 존재 자체로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인데, 이 험난한 세상 헤처나갈 힘은 어디서 얻는 것일까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태도는 아버지의 습관과 삶에 대한 태도가 고스란히 아들에게 스며들어 인생의 나침반과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과연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로 남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하니, 지금부터라도 좀 더 긍정적이며 인격적 성숙을 위하여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생전 아버지께 드리지 못했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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