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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도 방향 지시등은 필요하다. 마음의 결을 살피지 않고 들이치는 말은 난폭한 자동차와 같다. 가도 되는 때인지, 무언가를 물어도 되는 상황인지 신호를 주어야 관계의 흐름이 깨지거나 막히지 않는다. 방향 지시등을 켜는 일은 잠깐이면 된다. 간단하지만 중요하다. 깜빡이는 불빛은 바다의 등대처럼, 짙게 내린 안개에서 서로를 보호해줄 안개등처럼,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게 해준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일방통행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가을의 소슬바람과 함께 밤하늘 달이 환하게 떠오른다. 차고 기우는 달의 반복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신화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차고 이지러지는 달의 리듬을 인간의 탄생과 성장, 노쇠와 죽음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달이 생성하고 소멸해가는 순환적인 모습에서 인간의 죽음과 재생의 의미를 포착한 것이다. 휘어청 둥근 보름달은 자기 속도와 궤도에 따라 낮과 밤을 이어왔다. 달이 그려온 궤적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계절의 빛깔과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만나지 못 했을 것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누이는 밤을 무서워하는 동생을 위해 달이 된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님 계신 곳 비취오시라'로 시작하는 백제가요 <정읍사>는 멀리 시장으로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가 부른 노래라고 전해진다. 위험한 곳, 으슥한 곳을 잘 지나도록 달님이여 높이 솟아 님 계신 곳을 비춰달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로 잘 알려진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허생원은 소금을 뿌려놓은 듯 달빛을 받은 메밀꽃 밭을 지나며 고달프고 외로운 마음을 달랜다. 추억의 드라마 <서울의 달>은 어려운 달동네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며 함께 살아가는 안쓰럽고 애잔한 삶의 애환을 보여 주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달로 날아가는 판타지의 세계를 그린 영화 <ET>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동심의 세계로 이끈다.
달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래 바라봐도 눈이 부시거나 자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달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부드러워진다. 달의 운행에 따라 무수한 생명들이 살아간다. 이런 달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달은 소원을 빌거나 간절한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더 살갑고 애잔하다. 때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고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친근한 벗처럼 느껴진다. 달은 초라해진 마음자리를 은은하고 고요하게 품어주는 지시등이 되어준다.
곧 있으면 추석이다. 각자의 삶터에서 고유하게 살아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이다. 즐겁게 나눈 인사와 반가움은 어느 사이 그간 켜켜이 묻어두었던 상처의 시간으로 변해갈지 모른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관심과 격려하는 선의로 마음끼리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할 것이다. 병이 몸의 가장 약한 곳에서 시작되듯이, 사람의 다친 마음은 처음으로 되돌리기 어렵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어쩌면 더 살피고 애써야 하는 때가 명절이다. 속도와 경쟁으로 내달린 고단한 삶을 위로하기 위해 달의 더딘 변화를 자신의 생체리듬으로 옮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올 한가위에는 달을 보며 지친 마음을 회복하는 충전의 시간이길 바라본다. 그러기 위해 서로를 향해 마음을 맞추는 방향 지시등을, 반짝 켜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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