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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세월호 참사 직후, 청와대 홍보수석 이정현이 KBS에 전화를 넣었다. 보도국장이 연결됐다. 이정현 수석은 정부와 해경과 대통령의 심기를 걱정했다. 정부와 해경을 다루는 뉴스아이템들이 비판적이라고 따졌다. 어떤 것은 빼달라고 했다. 갈아치우는 것이 어렵다면 새로 녹음을 해서 보도 내용만이라도 갈아입혀달라고 요구했다. 2016년 6월 말, 소위 '이정현 녹취록'이 공개됐다. 공영이 아닌 대부분의 언론이 녹취록 파문을 다뤘다. 공영방송 KBS 기자 정연욱은 녹취록 사건을 보도하지 않은 간부들을 비판했다.
며칠 후, 경인지사에 근무하던 정연욱에게 제주총국 발령이 났다. 법원은 정 기자에 대한 KBS의 인사명령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사장과 보도본부장은 국회 국정감사장에 기관증인으로 출석했다. 선서 증인이었다. 보도본부장에게 국회의원 유승희가 질문했다. 홍보수석이 보도국장에게 외압을 가했다는 의혹에 대해, 일선 기자가 뉴스를 작성했는데 방송하지 않은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질문과 답변 사이에 사장이 끼어들었다. 답변을 요구하는 의원의 질문은 언론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말을 세웠다. “보도본부장 대답하세요”. 국회의원이 거듭 물었다. 사장이 오른쪽 뒤편의 보도본부장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사장의 말은 짧았다. “답변하지마”. 그 장면을 전국의 유권자 시민들이 생방송으로 지켜보았다. KBS의 민낯과 속살을 여실히 보여준 듯 했다.
언론노조 KBS본부가 4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사장과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파업 출정식에서 노조는 부역과 적폐를 청산할 것을 다짐했다. 노조는 파업특보에서 사장이 여러 가지 부역 행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군의 댓글공작 특종을 보도에서 누락시켰다든지,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든지, 이정현 녹취록 보도를 막고 대통령의 측근 비리를 축소하였다거나 선거직전 북풍 몰이를 하였다는 내용을 제기했다. 2011년 국회 도청의혹 사건에 연루되었다고도 주장했다. 도청의혹 사건은 KBS 기자가 민주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비공개 회의를 몰래 녹음하고 이 녹취록을 KBS가 작성, 당시 여당 국회의원에게 건네주었다는 의혹을 말한다. 경찰과 검찰은 의혹을 풀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건을 종결했다. 같은 해, 168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영국 신문 <뉴스 오브 더 월드>가 폐간했다. 민간인을 도청해서 뉴스를 취재·보도했다는 이유였다.
최근, 검찰은 KBS 기자의 도청의혹 사건 재수사에 돌입했다. 대한민국 대표 공영방송 KBS가 국회 야당 대표회의실에서 개최되던 회의를 도청한 것이 사실이라면, 도청한 내용을 KBS가 녹취록으로 만들어 여당 국회의원에게 전달한 것이 사실이라면, 도청한 자료를 공영방송한테 몰래 건네받은 국회의원이 야당 의원들에게 큰 소리 탕탕 쳤는데도 정부와 언론이 진실을 의도적으로 덮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굳이 언론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 보기가 너무 부끄럽지 않겠는가. 미국에서는 야당 사무실을 도청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다가 언론에 발각된 대통령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규명하고 넘어갔어야 할 공영방송의 도청의혹 사건이 이번 파업에 한 자락 닿아 있다. 그 점에서 볼 때 이번 파업의 의미는 크다.
9월 4일, 공영방송 MBC 노조도 파업했다. 사장 퇴진을 구호로 삼았다. 노조가 주장한 사장의 행각은 KBS와 비슷하다. 노조는 성명에서 총파업의 유일한 목표는 '공정방송 회복'이라고 명토 박았다. 5년 전 공정방송의 회복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MBC는 6명의 언론인을 해고했다. 해고가 무효라는 판결이 2심까지 이어져도 재판 계류를 내세워 복직요구를 묵살했다. 숱한 기자와 피디들을 징계하고 징계 무효 판결에도 불구하고 재징계 위협을 계속했다. 제작을 해야 할 제작진들이 '유배지'의 비제작 부서로 쫓겨나 빗자루 질을 했다. 촛불 현장에서 시민들에게 쫓겨나거나 MBC 로고를 떼고 몰래 취재하고 방송해야 했던 참상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이 총파업에 담겼다.
공영방송이 살아야 민주주의의 생명선에 피가 흐른다. 공영방송 종사자들이 어깨를 펴고 비좁게 모여 앉은 시민들 틈새를 해집고 다닐 수 있는 나라가 되기 바란다. 멀리 공영방송 차량의 로고만 봐도 가슴이 설레는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모멸과 좌절과 분노의 가시밭길을 아득바득 버티며 숨죽여 걸어온 종사자들에게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갈 길 험난할 언론인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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