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참을 수 없는 혐오의 언어들! 그때 우리는 왜 침묵했을까?

  • 오피니언
  • 목요광장

[목요광장] 참을 수 없는 혐오의 언어들! 그때 우리는 왜 침묵했을까?

류유선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승인 2023-12-13 08:47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2023010301000276500009251
류유선 책임연구위원
연말이 다가오면, 쌓인 일을 마무리하는 것도 벅차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혐오스런 말들의 저급함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성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말들은 세를 얻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입을 틀어막기도 한다. 특정인, 특정 지역, 특정 성별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어떤 단어와 용법은 모욕을 전달한다. 비록 그것이 나를 향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것을 중간에서 끊어내는 순발력과 용기가 필요한데, 혐오의 언어에 대응하는 순발력과 용기는 늘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혹은 잠들기 전에, 30년이 지난 후에 떠오른다.

언젠가 사석에서 "충청도 것들은 속을 모르겠다"는 말에 발끈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산 기간보다 충청도에서 산 기간이 더 길다. 그의 말이 발화되는 순간 충청도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타자로 충청도에서 태어난 그들은 호명된다. 분노의 배경이 '충청도'였는지 '것들'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두 요소가 합해져 마음이 상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때 나는 왜 침묵했을까?



또 다른 사석에서 "남편이 돈 벌잖아"라는 말에 나는 또 발끈했다. 치솟는 집값과 자녀교육비와 관련한 이야기 가운데 나온 그 말은 여러 맥락을 담고 있었다. 여성은 경제활동의 주체라기보다는 보조자라는 그의 인식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서 자신의 급여가 여성보다 더 높은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기가 찼다. 그때 나는 왜 침묵했을까?

늘 이런 식이다. 모든 개인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으며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것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학습하고 합의한 사회에서도 자칫 방심하면 이런 일을 겪게 된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이웃으로 평등할 거라는 신뢰와 믿음은 갑작스럽게 가족이, 동료가 혹은 이웃이 들이대는 혐오의 말들로 힘을 잃는다. 도대체 얼마나 이 경멸의 말들을 견뎌야 할까.



60세가 넘은 김명자 씨는 남편에게 그날의 모멸에 대해 말하고 싶다. 흔히 말하는 '도박, 불륜, 폭력'도 아닌데 남편이 뭘 그리 잘못했느냐는 주변 사람의 말도 서운하다. 김명자 씨가 삼십 년 넘게 잊지 못하는 사건은 어린 아들이 감기에 걸려 울던 겨울밤에 있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편은 "애를 싸질러 놨으면 잘 봐야지"라며 애 우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밖으로 나갔다. 열이 끓는 아들을 돌보느라 한마디 대꾸하지 못했지만, 김명자 씨는 아직도 그 말이 슬프고 분하다. 그때 김명자 씨는 왜 침묵했을까?

40대 최경희 씨는 자녀 돌봄과 가사, 그리고 직장을 병행하는 워킹맘이자, 커리어 우먼이다. 그녀는 얼마 전 동료와의 대화에서 느낀 모욕감을 그 동료에게 설명하고 싶다. 임신과 출산, 자녀 돌봄과 교육을 하면서, 직장 내 성과 경쟁 속에서 승진의 어려움을 경험한 최경희 씨는 자녀를 낳더라도 돌봄 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 일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저출생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는 "싸질러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누가 책임을 지느냐고"라며 돌봄의 일차적 책임은 부모라고 말했다. 논리적이지도 예의도, 교양도 없는 그의 말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지금도 그를 마주치는 것이 어렵다. 그때 최경희 씨는 왜 침묵했을까?

30대 이수진 씨는 전업주부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학부모들과 아이 예방접종이나 교육, 취업 이야기를 하며 카페에서 차를 마시기도 한다. 가끔 "주부들은 좋겠어. 애는 유치원 보내고, 편하게 커피나 마시고" 이런 식의 힐난을 옆자리에서 듣는다. 이수진 씨는 왜 이런 비난이 카페에 넘쳐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지만, 전업주부를 노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억울하다. 그때 이수진 씨는 왜 침묵했을까?

혐오의 말은 시공간을 넘나든다. 30년 전 최경자 씨의 말문을 막은 말은 이어지고 이어져 2023년을 사는 최경희 씨, 이수진 씨,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펼쳐지는 집, 일터, 카페에서 흘러넘친다. 혐오의 말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할 뿐이다. 혐오의 말은 화자의 상대편에 타자를 세운다. 내 말이 앞에 선 누군가의 입을 막는다면 내가 입을 닫아야 한다.

/류유선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날씨]대전·충남 1~5㎝ 적설 예상…계룡에 대설주의보
  2. '대통령 세종 집무실', 이 대통령 임기 내 쓸 수 있나
  3. 천안법원, 정지 신호에도 직진해 사망자 유발시킨 30대 중국인 벌금형
  4. 대전시장 도전 許 출판기념회에 與 일부 경쟁자도 눈길
  5. 천안문화재단, 2026년 '찾아가는 미술관' 참여기관 모집
  1. 백석대, 천호지 청춘광장서 청년·시민 협력 축제 성료
  2. 단국대병원, 2025년 감염병 대응 유공기관 선정
  3. 상명대 창업지원센터장, '창업보육인의 날' 기념 충남도지사상 수상
  4. 한기대 '다담 EMBA' 39기 수료식
  5. 나사렛대 평생교육원-천안시장애인평생교육센터 MOU

헤드라인 뉴스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시는 오랜 기간 문화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국립 시설 공백 속에서 '문화의 변방'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선 8기 이장우 호(號)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형 시설과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확충 사업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장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민선 8기 종착점을 6개월 앞두고 문화분야 현안 사업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전시가 내세운 '일류 문화도시' 목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보다는 향후 운영 구조와 사업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중도일..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김민석 국무총리와 더불어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대전시와 충남도 행정통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전격 회동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얼마 전 충청권을 찾아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띄운 것과 관련한 후속 조치로 이 사안이 급물살을 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김 총리와 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15일 서울에서 오찬을 겸한 간담회를 갖는다. 김 총리와 일부 총리실 관계자, 대전 충남 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회동에서 김 총리와 충청권 의원들은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 원도심 재편의 분수령이 될 '대전역 철도입체화 통합개발'이 이번엔 국가계획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4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초 철도 지하화 선도지구 3곳을 선정한 데 이어, 추가 지하화 노선을 포함한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종합계획' 수립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종합계획 반영 여부는 이르면 12월,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당초 국토부는 12월 결과 발표를 예고했으나,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과열되면서 발표 시점이 다소 늦춰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실제로 전국 지자체들은 종합..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